‘說’에 녹스는 한보철강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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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투자에 건설비 2배 소요돼 ‘예고된 비극’… ‘자금악화설’ 엎친 데 덮쳐
지난 1월15일 한보그룹이 자금악화설에 정면 대응하기 위해 연 기자 간담회에서 정한근 부회장(정태수 총회장의 4남)은 증권시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날도 한보그룹은 가까스로 부도 사태를 면했다. 그도 그럴 것이 5조7천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보이는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에 무리하게 투자하면서 한보그룹이 금융권에서 빌려 쓴 돈은 4조원 가량(69쪽 표 참조)이다.

이렇게 막대한 금융 비용 탓에 95년 1백72억원, 지난해에는 상반기에만 9백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기록했다(하반기 추산치는 미공개).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요즘은 거의 매일 오후 9시가 지나야 한보그룹 자금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른바 연장을 걸어 해결한다는 얘기다(통상 금융기관에 제시된 어음에 대한 잔고는 그 날 오후 2시30분까지 채워야 하나 어음교환소가 문 닫기 전까지 연장해 주는 관행이 있다). 한마디로 한보그룹의 자금악화설은 더 이상 설(說)이 아닌 것이다.

상업성 검증 안된 제철 방식 채택도 문제

증시에서 특정 기업에 대한 자금악화설이 나돌면 그 기업의 자금 사정이 악화하는 금융권의 속성으로 보아 한보그룹 역시 자금악화설이 자금난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 없어 보인다. 당초 증시에 한보그룹 자금악화설이 등장한 것은 지난해 연말 무렵부터였다.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휩싸였다는 소문이었다. 진원지는 불명.

증시에서의 자금악화설이 대부분 그렇듯, 1차 부도설이 곧 이어 등장했다.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했으나 긴급 대출로 간신히 최종 부도를 면했다는 내용이었다. 1월 초순 등장한 법정관리신청설 역시 순서대로였다.좀 색달랐던 것은 한보그룹이 신한종금의 적대적인 합병·매수(M&A)에 개입했다는 얘기였다. 김갑수(57)·이강호(63) 두 사람이 제일은행이 보유한 신한종금 주식 15.27%를 사기로 하고 매도 계약을 체결했는데, 상당수 증시 관계자들이 이 두 사람의 배후로 한보그룹을 지목한 것이다. 즉 자금 조달 창구를 마련할 목적으로 대리인을 내세워 신한종금을 인수하려 했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시각이었다.

그 후 연락이 두절된 두 사람은 지난해 말 계약 만료일까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아 계약금(38억5천만원)만 날렸다. 증시에서는 이 또한 정부와 언론을 의식한 한보가 신한종금의 적대적 합병·매수를 포기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한보그룹은 이런 의혹을 완강히 부인한다.

한보그룹이 이런 소문에 대해 적극 대응하고 나온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일단 이런 소문이 돌고 금융기관들이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 자금 사정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1월7일에는 증권거래소에 법정관리신청설을 부인 공시했고, 15일에는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당진제철소 냉연공장 준공을 계기로 대대적인 광고와 기업 설명회(IR)도 열었다.한보그룹이 증시에서의 자금악화설을 자금난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정면 대응 조처의 하나로 검찰에 진정서를 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울지검 특수 1부(박주선 부장검사)는 이에 따라 한보그룹 자금악화설을 유포한 혐의로 외국 증권사 직원들을 소환해 조사하고 있다. 특히 한보그룹은 진정서에 자금악화설을 명기한 외국 증권사들의 보고서들을 근거 자료로 첨부했다고 알려진다.

이에 대해 외국 증권사 증시분석가들은 상당히 억울해 한다. 동료가 소환 조사를 당했다는 한 분석가는“우리는 국내 증권사와 달리 매일매일 국내 증시의 주요 이슈를 써서 외국 투자가에게 보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보고서가 악성 루머를 유포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자금악화설이 먼저였는지 자금 악화가 먼저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한보그룹이 자금난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92년 당시 재계 순위 45위에 불과한 데다가 수서 특혜 분양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한보그룹이 일관 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계획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당시 상공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2조7천억원(계획 입안 당시 추정액)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일었을 정도였다. 다음은 당시 사정에 밝은 정부 한 관계자의 말. “한보측은 당진제철소가 3단계로 나눠진 공사여서 한꺼번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정 총회장이 소유한 부동산을 팔아 많은 부분을 메울 수 있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당진제철소 건설에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현재 90% 정도 공사 진척도를 보이고 있는 이 제철소는 최종적으로 5조7천억원 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기자간담회 당시 정부회장은 당초 자금 계획을 빡빡하게 잡은 데다가 매립지 조성과 공장 주변 인프라 구축과 공장 설계 변경 등에 예상치 못한 돈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더욱이 당진제철소는 미니밀(전기로)과 용융환원법이라는 첨단 제철 방식을 채택했다. 세계적으로 이 방식을 채택한 제철회사들이 몇 안될 정도로, 이 방식은 아직 상업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당진제철소 미니밀 제철소에서 생산되어 본격 판매에 들어간 제품들(주로 철구조물)은 아직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하반기 경쟁력 10% 올리기의 하나로 포항제철이 철강재 가격을 8% 가량 내리는 바람에 크게 타격을 입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그룹, 한보 불똥 튈까 걱정

한보그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매각 혹은 위탁 경영 방침을 굳혀 가는 가운데 이 제철 방식은 앞으로 한보철강의 진로와 관련해 가장 큰 논란거리이다. 한보철강을 인수하거나 위탁 경영을 맡을 만한 업체들이 상업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이 방식을 문제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의 경우 이미 정부에 당진제철소를 인수하거나 위탁 경영을 하기 어렵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 입장을 정리하는 데 참여한 포철의 한 관계자는 “단순히 재무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회사라면 검토해 볼 여지가 있지만, 설비 내용 자체가 문제라면 상황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포철과 함께 유력한 인수(혹은 위탁 경영)업체로 거론되는 현대도 난색을 표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정부나 채권은행단으로부터 제의가 왔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고로 제철 방식이 아닌 당진제철소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현대그룹은 오히려 한보철강의 투자 실패가 제철산업에 진입하려는 현대그룹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한보그룹은 현재 정부와 채권단의 이런 방침이 알려지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당진제철소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시점이어서 은행들이 3천억원만 추가 지원해 주면 정상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두 번에 걸쳐 각각 4천억원과 1천2백억원을 추가 지원한 채권은행단은 더 이상 자금 지원을 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특히 은행들은 추가 지원금에 대한 담보 명목으로 정태수 총회장 일가가 가진 한보철강 주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자금악화설의 끝이 해피 엔딩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한보 역시 예외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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