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소, 무르익는 조건부 허가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6.07.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첨단 방식 도입·최소 규모 건립 후 순차적 증설 방안 등 유력…현대그룹, 건립 추진 강행할 듯
 
장관들의 말은 정치인들의 발언만큼이나 애매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늘 해석하는 데 여지가 남는다. 그들 스스로 그런 투의 말을 즐기는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자기 발언이 가진 파괴력은 즐기되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책임을 면하자는 생각이다.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있다면, 자신의 발언이 완전히 잘못 해석되는 경우다.

지난 7월3일 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이 한 말이 바로 그랬다. 그가 이 날 기자간담회에서 한 문제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현대그룹의 제철소 사업) 계획서가 접수되면 장관 자문기구인 공업발전심의회(공발심)에서 협의하도록 하고 가급적 공발심에서 도출된 결론을 존중할 생각이다. 공발심의 결론이 부정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주무 부처의 의견을 밝히는 차원이기 때문에 현대그룹은 제철사업을 자체 판단에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들은 당연히 현대의 제철사업 진출을 반대했던 통산부가 입장을 바꿔 허용해주기로 한 것으로 이해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통산부가 허용할 것을 시사했다’라고 보도하자, 이를 우려해 오던 철강업계가 경악했던 것은 물론이다.

정작 더 놀란 것은 박장관과 통산부 실무자들이었다. 이들은 이 날 밤 부랴부랴 ‘제철업은 기술 도입 신고 수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진입에 제약이 없다’는 원론적 얘기를 되풀이했을 뿐이라는 해명 자료를 각 언론사에 돌렸다. 해명 자료의 내용이 알려진 후에도, 각 언론과 재계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장관이 물꼬를 트고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해 온 전례를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장관이 이 날 기자간담회에서 정말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통산부 실무자들과 측근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박장관이 이 날 시사하려 했던 것은 언론의 해석과는 크게 다르다. 박장관은 현대의 사업계획서 제출일이 임박하자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해 왔다. 이런 마당에 또 반대하자니 통산부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비칠 테고, 허용하자니 두고두고 말썽이 될 실책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진입 허용 여부를 둘러싼 경제적 논란은 87쪽 딸린 기사 참조).

“윗선에서 알아서 결정해 달라는 얘기”

김철수 전 장관의 재임 말기에 삼성 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입을 허용했던 것도 큰 부담이 되었다. 그 일 이후 현대그룹이 은연중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느냐는 논리를 펴왔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승용차사업은 제철사업과 달리 상공부가 기술도입신고서를 받고 이를 수리해야만 사업이 가능한 사항이었다.

당시는 정치권이 통산부 실무자들의 반대를 뒤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치권의 결정에 반발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상당수가 골칫거리를 밖에서 해결해 주어서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입장을 비쳤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솔직하게 통산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밖에 없었다. 승용차사업과 달리 철강 업체가 사업을 강행할 경우 이를 딱히 막을 명분이 없다는 얘기였다. “말을 뒤집으면 실무 부서인 통산부 윗선에서 알아서 결정해 달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박장관의 의중을 잘 아는 한 인사의 말이다.

결국 박장관의 발언은 현대의 계획서 제출 강행으로 맞게 될 곤란한 상황을 사전에 피해보자는 예봉 꺾기 전략이었던 셈이다. 3일 저녁 박장관은 자신의 어법을 자탄하기에 이르렀다. 기자들로서는 허용을 시사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는 법.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당시 이른바 총대를 멨던 이들은 삼성 자동차 공장 유치를 바라던 부산 지역 상공인들과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정치권이었다. 그러나 현대가 제철소 입지로 검토하고 있는 곳은 전남 율촌과 충남 서산, 군장 등 세 곳으로, 이른바 ‘정치적 배경’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원군을 만나지 못한 현대그룹으로서는, 박장관의 정치적 발언을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정치적으로 재활용하려 들고 있다.

첨단 방식, 불황 때 공급 능력 신축 조절

당초 현대의 계획서 제출 시나리오는 두 가지로 압축되어 왔다. 하나는 7월께 통산부(공발심)에 직접 제출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사전에 철강업계의 반대 여론을 누른 후 10월에 열리는 철강공업발전민간협의회 총회를 통해 이를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박장관 발언 이후 현대는 첫번째 시나리오를 선택해 7월까지 계획서 제출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전남 율촌으로 굳어져 가던 공장 입지 문제도 여러 가지 정치적 사항을 고려하기 위해 원점으로 되돌렸다(삼성의 경우와 달리, 7백만평 이상이 소요될 제철소 입지는 토지 보상을 비롯한 부지 확보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현대가 계획서 제출을 강행할 경우 정부가 과연 어떤 입장을 밝힐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나 통산부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여해온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양쪽(통산부와 현대)의 입장을 곤혹스럽지 않게 하는 선에서 결정되지 않겠느냐”라고 밝혔다. 이는 현대그룹의 제철소 건설을 조건부로 허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건부 허용은 단서 조항을 달아 허가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제안되기도 한 단서들로는, 우선 제철소 자체를 용융환원식이나 전기로(미니밀) 같은 첨단 방식으로 짓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공급이 넘쳐 불황이 닥쳤을 때 고로를 갖춘 일반 제철소처럼 전체를 폐쇄하지 않고도 공급 능력을 신축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대안의 장점이다. 그러나 두 가지 방식 모두 아직 기술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상업성을 보장할 수 없어, 현대그룹이 이를 기피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김세영 교수(단국대·무역학과)는 “이런 방식으로 생산한 철강 제품은 현대 그룹의 자체 철강 수요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에 적합치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초의 설비 규모를 최소한으로 하고, 철강 산업의 수급 상황을 보아 가면서 증설을 허용하는 조건부 허용도 가능하다. 현재 현대그룹의 계획은 첫 단계에 고로를 2기(6백만t) 설치한 후 곧 4기까지 늘리겠다는 것인데, 이와 달리 최초 제철소 건설 당시 조강 능력을 3백만t 혹은 6백만t 이하로 한다는 조건으로 허용한다는 대안이다.

실제로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나서 촉매 역할을 한 박장관이 자신의 발언을 후회할지 혹은 즐길지는 아마도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