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흔들릴 때 돋보이는 '오뚝이 일본'
  • 이호철 (한국국제협력단 연구실 연구위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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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엔고를 겪으면서 여러 번 불황에 직면했지만, 오히려 위기 때마다 경제 구조를 개선하고 품질을 향상시켜온 일본의 지혜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경제는 경상 수지 적자가 늘고 성장률이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기회에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근본적으로 깨뜨려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엔고를 전화위복으로 삼은 일본 경제의 교훈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71년 사상 처음 엔고를 겪은 일본 정부와 경제계는 무척 당황했다. 그 해 8월 그때까지 1달러당 3백60엔으로 고정되었던 환율제도가 변동제로 바뀌면서 엔화는 연말까지 3백8엔대로 크게 절상되었다.

섬유·철강·선박 등 그간 성장을 이끌어온 간판 산업들은 수출이 급격히 줄고 국내 수요마저 동결되자 순식간에 정체 산업으로 변했다. 섬유 업계는 누적된 재고를 처리하려고 덤핑 수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철강 업계는 불황 카르텔로 스스로 생산량을 줄여 어려운 순간을 넘겨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편 당시 2조엔 상당의 외화 채권을 갖고 있던 조선업계는 더욱 타격이 컸다.

일본 자동차도 처음에는 천덕꾸러기였다

일본 정부는 수출 길이 막힌 중소기업에 긴급 자금 지원을 실시하고, 조선업계에는 외화 손실액 중 66%를 보전해 주었다. 또 판매 부진으로 고전하는 기업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재정과 금융 전반에 걸쳐 경기부양책을 펴기로 했다. 72년 들어 정부가 공공 투자 확대와 금융 완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침에 따라 물가는 다소 뛰었지만 업계는 불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것이지만 이런 방법은 건전한 것이 못되었다. 제품에 대한 수요 확대는 실수요가 증대한 데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업계는 합리화 노력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차 엔고 이후 일본 정부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 대책이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업체들에 대해 잠시 시간을 벌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구조 개선을 독려하기 위해 경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솔직히 알리고 국민의 협조를 구했다.

첫 엔고 파동을 경기 부양책으로 모면하려고 했던 일본은 석유 위기를 맞아 물가가 폭등하자, 그간 감춰진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야 했다. 물가가 뜀에 따라 실질 소득이 준 근로자들은 더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임금 인상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진 기업들은 물건값을 올려 받았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계기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런데 74년 31.9%까지 치솟았던 주요 기업의 임금 인상률이 75년 한꺼번에 13.1%로 떨어져 버렸다. 다음해에는 8.8%로 더욱 낮아졌다. 이때부터 임금 상승률은 한 자리 수로 안정되었다. 덕분에 물가와 고용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와 일본의 산업은 석유 위기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일본은 엔고와 석유 위기가 겹치면서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저성장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사회에 성장의 원동력이 급속히 마모되어 간다는 위기 의식이 확대되면서, 근본적인 치유책으로서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은 힘으로 요구를 관철하는 형태에서 대화로 생산성 향상의 성과를 분배 받는다는 형태로 세련되게 바뀌었다. 그래서 투쟁할 때는 붉은 띠를 매고 맹렬하게 싸우지만, 임금 교섭 때만은 양측이 정장을 입고 진지하게 회사의 장래와 분배 문제를 논의했다.

일본 자동차가 세계 시장에 우뚝 서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일본 차는 천덕꾸러기였다. 69년 <아사히신문>은 구조에 결함이 있는 일본 차들이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불량차 추방 캠페인’을 벌이면서, 도요타와 닛산만 해도 19개 차종 47만 대에 기술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정도였다. 그런데 75년께부터 세계 시장에서 일본 차의 위상이 바뀌었다. 종업원의 임금 인상 자제, 철저한 품질 관리 노력에 기업이 과감한 기술 투자를 한 것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석유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 정부는 연비와 배기 가스에 대한 환경 규제를 엄격하게 강화했다. 이 때문에 미국 업체들은 8백억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새로운 소형차 개발, 엔진 연소 효율 향상, 차량 경량화를 위한 신소재 연구 등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혼다기연(本田技硏)은 일찌감치 에너지 절약과 저공해 엔진 개발에 착수하여 이미 고효율 엔진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혼다는 73년 1월 세계 유수 자동차 업체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미국의 대기오염방지법과 75년의 에너지규제법을 통과하여, 그해 12월부터 신형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를 판매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도요타·닛산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앞을 다투어 전자 기술을 응용한 전자제어식 연료분사기(EFI), 전자자동변속기(ETC), 삼원융매(三元融媒) 방식에 의한 공연비 제어 같은 신기술을 개발하여 속속 실용화했다.
 

기술 개발·설비 투자와 규제 완화·구조 개혁 병행

설비 투자에서도 72년 닛산이 처음으로 용접 로봇 8대를 생산 현장에 설치했다. 당시 로봇은 미국 기술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75년께부터 그같은 관계가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로봇은 유압식이 주류였는데 야스카와(安川) 전기가 전력 소비와 진동이 적고 유지·관리가 쉬운 전동식 로봇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일본제 로봇이 미국제를 몰아내고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일본 공장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런 활발한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는 전자제품과 반도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가전업계는 판매 신장의 주역이었던 컬러 텔레비전 보급이 정체되자, 워크맨·VTR·캠코더·콤팩트 디스크·전자 게임기 등 신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면서, 한편으로는 절전형·시간 절약형 등 제품 개선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품질 경쟁력을 향상시켜 결국 잃어버린 가격 경쟁력을 극복했다.

91년 상반기부터 거품 경제가 무너짐에 따라 일본에는 또다시 불황이 엄습했다. 그러다 93년 봄 3개월 간의 경기선행지수가 나아지자 경제기획청은 경기가 최저점을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내 엔고 폭풍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경기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경제기획청은 불황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고 정정 발표했다.

4차 엔고로 장기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95년 11월 일본 정부는 새로운 중장기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서 정부는 계획의 명칭 자체도 ‘구조 개혁을 위한 경제사회계획’이라고 붙이고, 일본 사회가 갖고 있는 고비용 구조를 끊고 경제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분명한 정책 방향을 보여주었다. 즉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높은 전력 등 열 가지 고비용 분야에 대한 시정 목표와 방안을 제시하고, 일곱 가지 성장 기대 분야를 정해 새로운 기업의 진출을 독려했다. 아울러 이를 위해 규제 완화 등 구조 개혁에 하루바삐 나서지 않으면 잠재 성장률이 3.0%에서 1.75%로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엔고가 거듭되다 보니 현재 달러화에 대한 엔화 가치는 25년 전에 비해 약 3.5배나 올라 있다. 비록 물가와 임금 수준이 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달러화로 환산한 임금과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화를 거듭했다 하더라도 많은 기업들이 임금이 싼 지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85년 세번째 엔고가 닥쳤을 당시 일본 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생산 거점을 옮겼다.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 가격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지 생산을 통해 무역 마찰도 피하고 환율 변동에 따른 저항력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김에 따라 국내에서의 생산·투자·고용이 감소하게 되었다. 즉 생산 거점 이전에 따라 국내 고용이 줄고, 해외로 진출한 일본계 기업으로부터의 역수입에 따른 국내 생산 부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더 걱정한 것은, 제조업이 힘들다고 모두 해외로 빠져나가 버리면 국내에서 제조업의 불씨가 영영 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컴퓨터의 기억 매체인 하드 디스크를 움직이는 정밀 모터로 세계 시장의 80%를 석권하고 있는 니혼전산(日本電産) 나가모리 시게노부(永守重信) 사장은 ‘50% 철학’을 내세웠다. 부품·소재의 해외 생산 비율과 일본 국내의 자사 제품 비율을 각각 50%로 한다는 것이다.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다면 당장의 엔고는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가전산업처럼 일단 폐쇄된 공장은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미국은 텔레비전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70년대 달러고 시기에 경쟁력을 잃게 되자 순식간에 외국 기업들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제조업체들은 인건비가 싼 아시아 등지에 공장을 이전하면서도, 고부가가치의 핵심 기술만큼은 절대 넘겨 주지 않았다. VTR 조립 공장을 다른 나라에 세웠어도 헤드 생산만큼은, 카메라 생산 공장도 셔터만큼은, 반도체 공장을 이전하더라도 생산 설비 기술만큼은 그대로 쥐고 있었다. 그 결과 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대일 수출이 늘어나면 아시아에 대한 일본으로부터의 설비재나 중간재 수출도 늘어나도록 교묘히 연결한 것이다. 이것도, 모든 생산 기술을 한꺼번에 이전했다가 무역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경험으로부터 일본이 터득한 교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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