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제2의 만델라냐, 제2의 페론이냐
  • 이두원 (연세대 교수·경제학 ) ()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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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대선 직전 몇몇 외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있었던 일. 한 기자가 “만약 DJ가 당선된다면 한국의 만델라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다른 기자가 “잘하면 만델라 이상이 되겠지만 잘못하면 페론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맞받았다.

만델라는 3백50여 년 간의 백인 통치가 끝난 뒤 용서와 화합으로 흑백 갈등을 종식시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지도자이며, 페론은 건전하게 성장하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70년대 민중주의 지도자임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완만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 73년 노동 계급의 지지를 업고 집권한 페론 정권은 강력한 소득 재분배를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을 주도했다. 먼저 노동자의 임금과 최저임금 수준을 일률적으로 상향 조정했으며, 이러한 고임금이 고물가로 연결되지 않도록 물가를 동결했다. 이와 동시에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이미 과투자 상태였던 산업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 정부의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저리 특혜 금융을 기업들에 제공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이 보였으나, 74년 말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만한 재정 지출과 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금융 지원, 그리고 턱없이 높은 고임금으로 인해 물가 상승 압력이 누적되기 시작해 76년에 이르러서는 440%라는 살인적인 고물가 시대를 맞게 되었다. 또한 정부의 수입 억제와 각종 지원에 안주하던 기업들의 경쟁력이 점차 추락해 75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겪게 되었다.

고물가와 저성장은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을 급격히 감소시켜 76년 말의 실질 소득은 73년 소득의 절반밖에 되지 못했다. 결국 노동자 계급을 위한다는 집권 초기의 의도와 달리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오히려 심해져 이후 국부의 해외 유출로까지 연결되었다.

물론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 그러나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 경기를 부양하려는 시도, 현대자동차 사태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 주는 듯한 정치권의 자세, 수입을 억제하고 부유층의 소비를 죄악시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 과잉 투자된 설비를 구조 조정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확장의 여지로 보는 시각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오늘날의 한국이 70년대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아 고통스러운 구조 조정보다는 노동 계급과 기업가들에 대한 각종 보조와 특혜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지금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 조정에 쏟아야 할 때이며, 설사 이러한 과정에서 실업과 소득 분배 악화와 같은 일시적인 부작용이 생긴다 해도 이를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단기적 민심 얻기에 치중하면 실패는 명약 관화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처한 여건은 많은 면에서 페론보다는 만델라와 흡사하다. 김대통령은 ‘인동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과거 정권에서 무수한 고초와 탄압을 겪었으며, 이를 극복하고 대권을 쟁취한 후에는 과거 정권에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수 차례 천명했다. 이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만델라와 함께 노벨평화상 후보로서 종종 회자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대통령은 자타가 인정하는 경제 전문가로서 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설픈 정치 논리로 과거에 대한 사정을 해 국론을 소진하고, 기업가와 노동자들에 대한 무원칙한 지원과 보호로 단기적인 민심 얻기에 치중한다면 한국 경제의 장래는 잘해 보았자 장기적인 침체에 빠진 일본의 모습을 닮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는 70년대의 아르헨티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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