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경제]미국의 '경제 대통령' 그린스펀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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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의 기본 원칙은 한마디로 ‘인플레 억제’이다. 안정 성장론자인 그에게 유권자들을 의식하는 정치인들로부터 경기를 활성화하라는 외압이 쏟아졌지만 그린스펀은 ‘황소고집’으로 버티며 미
“정말로 동물 같군, 동물 같아!” 지난 4월6일 오후 미국 버지니아 주 리틀브라운에 있는 한 호텔의 정원.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 75명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 키신저·콜린 파월·바버라 월터스 등 미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하객들 앞에서 71세인 할아버지 신랑이 21세 연하인 신부에게 깊고도 오랜 키스를 퍼부었던 것이다.

이 날 미국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은 신랑은 ‘미국의 경제 대통령’‘미국의 제2인자’ 소리를 듣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 그는 12년간 열애한 끝에 NBC 텔레비전 수석 외신 기자 앤드리아 미첼과 결혼에 성공했다.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두 사람은, 이혼한 경험까지 서로 닮았다.

그로부터 4개월 여가 흐른 지난 8월11일. 이 날은 그린스펀에게는 뜻깊은 날이었다. 연준 의장에 취임한 지 만 10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연준 의장은 우리로 치면 한국은행 총재에 해당하는 자리. 그러나 둘 사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연준 의장은 의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한 번 임명되면 4년 임기가 확실히 보장된다. 그리고 금융 정책에 관해서는 대통령이든 의회든 간섭할 수가 없다. 완전히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연준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미국 쇠퇴론’ 잠재운 안정 성장의 주역

87년 처음 연준 의장에 임명된 그린스펀은, 레이건·부시·클린턴 세 대통령이 들고 나는 동안 줄곧 연준을 맡아 왔다. 게다가 그의 인기는 최근 들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인터넷에는 그를 숭배하는 홈페이지가 개설되어 있을 정도다 (http://members.aol.com/tralst/gspan.htm).이처럼 그의 인기가 치솟는 이유는 91년 3월 이후 7년째 미국이 장기 호황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재정·무역 부문의 쌍둥이 적자로 골치를 썩이던 미국은,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호황 국면이다. 지난해 3%였던 국내총생산(GDP) 실질 성장률은 올해 1/4분기에는 무려 5.9%로 급상승했다. 실업률은 5% 이하로 떨어져 25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고, 인플레이션율은 2.5%를 밑돌고 있다. 인플레를 동반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미국의 적정 성장률이 2∼3%인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과 같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낮은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오히려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정상적인’ 장기 호황을 설명할 마땅한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기존 경제 논리로는 지금의 호황 국면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완전히 새로운 인식 체계에 근거한 ‘새 시대 경제학(New Age Economy)’을 주창하기도 한다.

80년대 말 당연하게 여겨졌던 ‘미국 쇠퇴론’을 잠재우고 미국 경제가 장기 호황을 누리게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린스펀은 효율성 향상이라고 대답한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정보통신 기술 발달 △M&A를 통한 산업 구조 재조정 성공 △정부 규제 완화와 연준의 효율적인 통화 정책을 통해 효율성을 높인 것이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경제인들은 그린스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올해 초 경제 전문지 <인베스터>가 미국 경영인 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도 그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응답자의 87%가 연준의 금리 정책이 미국을 살렸다고 대답했고, 미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65%가 그린스펀이라고 대답했다. 올해 초 미국의 한 소비자단체가 행한 여론 조사 결과에서도, 그린스펀의 통화 정책이 옳았다는 대답이 전체 응답자의 80% 정도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그린스펀이 견지하고 있는 금융 정책의 기본 원칙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인플레 억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인플레를 잡지 않고는 절대로 경기가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인플레 조짐이 있으면 금리를 인상해 경기가 과열하는 것을 사전에 막고, 경기가 침체 양상을 보이면 금리를 내려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안정 성장론자인 그는 기본적으로 백악관이나 의회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권자를 의식하는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이자율을 낮춰 경기를 활성화하라고 요구한다. 지난 4월 리처드 게파트 하원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의원 59명이 그린스펀에게 보낸 공개 질의서 내용도 그런 것이었다. ‘인플레를 사전에 막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는 정책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경제 성장과 번영만 막는다’는 비판이었다. 정치권으로부터 무수한 외압이 쏟아지지만, 그린스펀은 우직하게 자기의 고집을 지켜 나갔다. ‘황소’라는 별명도 그렇게 해서 얻었다.

그린스펀이 대통령과 부딪친 사례는 무수히 많다. 88년 레이건 대통령 집권 시절, 재무부가 이자율을 낮춰달라고 부탁했다. 조지 부시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경기 부양이 필요하다는 백악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몇달 뒤 그린스펀은 반대로 이자율을 높이는 조처를 취했다.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 인사들이 연준의 긴축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을 때도 그린스펀은 요지부동이었다. 대통령의 요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정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그린스펀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 가자 클린턴 대통령은 다른 후보를 물색했지만 <이코노미스트> <비즈니스 위크> 등 국내외 언론이 중심이 된 여론의 강력한 힘에 떠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임은 확고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주가가 춤을 출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굳이 금리를 올리거나 통화량을 조절하지 않더라도 그는 말 한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2월 초에 있었던 사건. 미국 경제인들과 만난 그린스펀이 미국 증시가 “비정상적으로 활황을 보이고 있다”라고 얘기했다고 알려지자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144포인트나 폭락했고, 일본·독일의 주가도 덩달아 주저앉았다. 연준이 금리를 올려 주가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가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현재의 경기 전망이 옳다면 현재의 주가는 적절한 수준이다”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93 포인트나 상승했다. 또 지난 7월22일 의회에 제출한 상반기 보고서에서 ‘지금 당장은 인플레 우려가 없다’라고 밝히자, 다우존스 주가지수는 154.93 포인트나 뛰었다. 그린스펀이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금융 정책이 달라지기 때문에, 뉴욕의 증권가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의미와 뉘앙스, 톤까지도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한때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해 테너 색소폰 연주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방향을 전환해 뉴욕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행정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74년. 은사였던 아서 번즈 연준 의장의 천거로 포드 행정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87년 폴 볼커의 후임으로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규제 제거해야 경제 발전한다”

현재 미국 정부에서 그와 손잡고 일하는 사람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95년 1월 취임한 그는 그린스펀과 마찬가지로 인플레 억제주의자이다. 최근 미국의 <뉴스위크>는 루빈 장관을 표지 인물로 내세우고, 그와 그린스펀 두 사람이 바로 미국 경제 호황의 주역이라고 치켜세웠다.

지난해 11월 그린스펀은 일본의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 대장상과 만나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금융 빅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비효율적인 각종 규제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린스펀이 한국의 금융 개혁 작업을 본다면 무슨 얘기를 할까. 한국판 빅뱅을 꿈꾸며 마련했던 금융개혁안은 정부 기관 간의 이기주의로 인해 누더기로 변했고, 예측 가능한 정치를 펴겠다던 김영삼 정권에서는 경제 부총리가 벌써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게다가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언제 망할지 모를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스펀은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 또 언제쯤 우리는 그린스펀 같은 경제 영웅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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