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 건설 놓고 힘겨루는 정세영과 정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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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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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다음은 현대다’.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이 승용차 시장에 진입한 데 이어 현대그룹이 제철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대그룹은 지난해 7월 제철사업 진출 의지를 공식화한 이래, 올해 1월에는 부산 녹산공단에 압연공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표면상으로는 제철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을 허용한 정부가 현대그룹의 투자를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제철사업 진출을 둘러싸고 현대그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뜯어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그 예로 우선 그동안 이 일을 추진해온 주체가 바뀐 점을 들 수 있다. 당초 일관 제철소 건설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힌 계열사는 현대강관이다.

일부 언론을 통해 현대그룹의 제철사업 진출 계획이 먼저 보도된 후 현대강관 임평균 사장이 상공자원부(현 통상산업부)를 방문해 부산 가덕도나 전남 율촌공단에 일관 제철소 외에도 후판·열연·냉연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설명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제철사업은 현대강관 한 회사만이 추진하기에는 벅찬 사업인 만큼 계열사끼리 힘을 합쳐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에 일관 제철소 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업체는 인천제철이다. 물론 종합기획실도 재원 조달이라든가 투자 계획과 같은 것을 그룹 차원에서 검토해 왔다.

이와 동시에 현대그룹은 삼성그룹처럼 부산 상공인들과 연대해 제철사업에 뛰어들겠다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러나 부산에 일관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현대의 전략은, 부산 상공회의소가 이를 반대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자동차공장과 달리 용광로가 있는 일관 제철소는 공해가 심해 부산 지역 상공인들이 제철소 유치를 내켜 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그룹과 부산 상공회의소는 올해 1월 부산 녹산공단에 현대그룹이 자동차용 압연 강판 및 제강공장을 세운다는 것에만 합의했다.

그룹 내에서 제철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회사는 MK 계열로, 제철사업의 실질적인 오너는 정몽구 회장이다. 자연히 그룹 전체를 통솔해야 하는 정세영 회장으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제철사업 진출은 사전에 정세영 회장과 상의하지 않고 추진한 것이어서 처음부터 미묘한 불협화음을 냈었다. 당초 정세영 회장은 자신에게 보고되지 않은 사실이 언론에 먼저 알려지자 격노했었다.

따라서 만일 정세영 회장이 제철소 건설 문제를 베트남측과 협의할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베트남에 제철소를 건설한다면 국내에 제철소 건립을 추진해온 정몽구 회장의 논리는 궁색해진다.

물론 정세영 회장의 베트남 출장 때 제철사업 문제가 거론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현재 베트남 정부와 공식으로 협의하게 될 사업으로는 선박 수리 및 조선소, 사회간접자본, 자동차 합작 공장 건설 등이다. 정세영 회장의 베트남 출장에 수행할 사장단의 면모가 드러나면, 제철사업의 진정한 오너를 놓고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이 물 위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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