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권 화폐 사기단 청와대 노렸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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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비서관 ‘실명화 돕겠다’ 확인서 써줘



"전직 대통령들이 조성한 정치 자금이 수조 원 내지 수십조 원에 이르고, 그 돈이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현혹한 후, 자신들이 마치 현정부와 연계하여 이를 극비리에 양성화하는 책임자인 것처럼 행세하며….”
서울지검 강력부(부장 김규헌)는 1월24일 구권(舊券) 화폐 사기단 8개 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구권’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 발행된, 은색 점선이 없는 10000원권 지폐인데, 흔히 과거 정권이 사용하다가 남은 통치 자금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최근에는 1994년 김영삼 정권 초기에 발행된 은색 점선이 있는 10000원권에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 검찰은 사기단 가운데 9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으며, 아직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20여 명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구권 주인은 과거 정권 주무른 실세들”



이런 상황에서 구권 화폐 사기단이 현정권의 핵심부에도 접근해 구권 실명화를 노렸다는 증언이 나왔다. 권력 핵심부에서도 ‘구권이 실제로 확인된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이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일부 인사는 비밀리에 사기단과 만나기도 했다.



구권 화폐 사기 조직이 동교동계 고위 인사 ㅇ씨에게 처음 접근한 시점은 1999년 말. 야당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부산 출신 사업가 김 아무개씨가 그를 찾아오면서부터였다. ㅇ씨는 “사람이 자주 바뀌기는 했지만, 한달 전까지 이들이 찾아왔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등 신분이 확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다.





구권 화폐 사기단은 이 인사의 신뢰를 얻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주민등록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보여주며 자신들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구권이 실제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돈더미 앞에 최근 신문을 붙여놓고 찍은 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름의 정연한 논리도 개발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법대로’이다. 그가 정권을 잡으면 구권을 실명화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현정권에서 실명화하고 싶다. 우리 조직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우리가 움직이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 돕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수십조 원을 실명화하면 증여세를 내야 하므로 절반은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금액이 남는다. 이 돈도 우리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니라 국가가 요구하는 사회간접자본 시설 구축이나 중소기업 회생 작업에 쓰겠다. 사리사욕을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묶여 있는 자금을 국가를 위해 요긴하게 쓰자는 것이다. 도와 달라.”



사기꾼들은 이 인사에게 돈의 실제 주인은 3공화국 때부터 정권을 주물러온 실세들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실명화 작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6억원을 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해 실제로 돈 거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교섭’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ㅇ씨의 말이다.



“그들은 한국은행에 직접 돈을 넣기를 원했으나 현행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구권을 가져오기로 얘기가 되어 한 은행 지점에서 은행 고위층과 지점장이 대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지점 차장이 ‘이런 돈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들은 돈을 싣고 오다가 차를 돌렸다고 말했다.”



주목되는 것은 이런 과정에서 당시(2000년) 한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이들에게 ‘확인서’를 써주었다는 점이다. 핵심은 ‘구권을 갖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면 실명화를 돕겠다’는 것이었다. 이 수석비서관이 누구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청와대에서는 구권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실명화 작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확인서의 원본을 갖고 있던 김 아무개씨는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이후 사기꾼들이 청와대나 ㅇ씨를 팔고 다닌 흔적이 드러난 것은 없다.



‘대박 심리’에 빠져든 정권 핵심 인사들





현재까지 동교동계 핵심 인사에게 접근했던 사기 조직과 서울지검에 검거된 사기 조직 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지검 강력부 송영호 검사는 “조사 과정에서 정치권 인사와 접촉한 사실은 전혀 드러난 것이 없다. 이들은 주로 사채업자나 중소기업 경영자들과 접촉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지검의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1월 중순쯤 ㅇ씨를 찾던 사기단의 발길이 끊겼다는 점, 사기꾼들이 사정이 있어 절에 간다고 이 인사에게 ‘잠적’ 이유를 설명한 점 등은 간접적으로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송검사는 “적발된 조직말고도 훨씬 많은 사기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 구권 화폐 사기는 현재 진행형이다”라고 말했다.



권력 핵심 인사들마저 구권 화폐 사기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사기꾼들은 지난 정권의 정치 실세들은 상당한 비자금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악용한다. 5공 청문회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 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시중에서는 비자금이 당연히 있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더구나 2000년 5월 장영자씨가 구권 화폐 사기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구권을 둘러싸고 ‘있다’ ‘없다’ 논란이 치열했다. 사기꾼들은 이런 틈을 파고들어 실명화에 필요한 경비를 대면 20억∼30억 원을 벌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가만히 앉아서 수십억 원을 벌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면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평상심을 잃는다. 서울지검의 수사 과정에서 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구권 화폐 사기단으로부터 세 번이나 사기를 당해 5억원을 날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난번까지는 사기꾼들이었지만 이제 당신은 정말로 행운을 잡았다”라는 사기꾼들의 말에 세 번째로 속아넘어가 신세를 망쳤다.



구권 화폐 사기 조직은 대개 진짜 사기꾼은 뒤에 숨고 중간책을 내세워 자금주를 물색하는 경우가 많다. 중간책 가운데는 사기꾼도 있지만 진짜 사기꾼에게 속아 실제로 구권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전주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피해를 본 사람들 가운데는 이들 ‘믿을 만한’ 중간책을 보고 돈을 내준 사람이 많다. 이처럼 구권 화폐 사기단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기본적인 신원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송검사는 “핸드폰을 추적해 보면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 나오고, 수표를 조회하면 유령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검찰과 한국은행 등 관계기관은 구권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사기꾼들 사이에서 구권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실제로 거래된 경우도 없다 △지금까지 발행된 10000원권 지폐 다섯 종류 가운데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것을 모두 합쳐도 19조5천여억 원에 불과하다(63쪽 표 참조) △1조원을 보관하려면 최소한 실평이 30평 정도 되는 공간이 필요한데, 이런 공간을 몇 명의 개인이 비밀리에 관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종합하면 사기꾼들이 말하는 ‘수십조 구권’은 애초부터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도 안되는 구권 실명화에 청와대까지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엄청난 노다지가 나올 것으로 보고 진도 앞바다 보물 발굴 작업을 지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시기도 비슷하다. 비록 한때일지라도 행운이나 요행을 바라는 ‘대박 심리’가 정권 핵심부 인사들의 심리를 지배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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