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나누는 ‘빈자의 은행’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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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 위한 사회연대은행 출범 담보·보증 없이 천만원까지 대출



서울 신림동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박효영씨(37)에게 은행은 철옹성이나 다름없다. 단돈 몇백만 원을 대출받기 위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박씨는 급하게 목돈이 필요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달러 빚’을 낸다. 달러 빚의 이자는 하루 0.5∼1%. 100만원을 빌리면 이자를 하루 5천∼1만원씩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 한 달로 치면 무려 15∼30% 이자를 내는 셈이다. 박씨는 자기 주변에 달러 빚을 얻어 쓰는 사람이 많다며 “고리(高利)가 나와 이웃들의 삶을 멍들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기 이름으로 된 방 한 칸이라도 있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담보물만 있으면 연 이율 5∼7%짜리 은행돈을 수백만∼수억 원씩 빌려다 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방 한 칸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현실이다. 박씨는 “가진 사람은 가진 것만큼 더 쉽게 가진다. 그러나 바닥에서 기는 사람은 자꾸 더 가질 게 없어진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박씨 같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저소득층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회연대은행이 2월26일 발족식을 갖고, 5월부터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회연대은행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증인이나 담보물 없이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김성수 이사장(성공회 대주교)은 건강도 나쁘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못 한 채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결속과 믿음을 빌려주는 은행이 탄생했다”라고 말했다.


창업 희망하는 여성 가장에게 우선 융자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대은행 임은희 홍보실장에 따르면, 대출 심사는 엄격히 이루어진다. 일단 5월에는 창업을 희망하는 저소득층 여성 가장한테만 융자해줄 계획이다. 대출금 최고 한도는 천만원, 사업 성격에 따라 조금 더 많아지거나 적어질 수도 있다. 연 이율은 4%. 이자와 원금은 3년 동안 나누어 갚으면 된다.
특이한 점은 대출을 개인이 신청해도 되고, 공동으로 신청해도 된다는 것이다. 은행측은 특히 공동 대출과 공동 창업을 적극 권장할 태세다.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사업을 펼치고, 상환을 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또 사업 기획·창업·경영·기술·판로에 대한 자문에 수시로 응할 예정이다. 임실장은 “5년 내에 기부금과 소액 모금 운동으로 자본금을 2천억원으로 늘려, 더 많은 저소득층에게 융자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저소득층만을 위한 금융기관은 사회연대은행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0년 6월부터 부스러기사랑나눔회가 운영하는 ‘신나는조합’(조합)이 저소득층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사회연대은행과 조합의 운영 방식은 많이 다르다. 우선 조합은 개인 대출이 안된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처럼 5명이 모임을 이루어야 대출을 받을 수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조합은 대출도 한 사람당 100만∼3백만 원씩 모두 천만원 안팎을 해준다. 조합의 김병수 자활사업팀장은 “그라민 은행의 돈을 빌려 그 은행의 운영 방식을 따르다 보니, 한국 상황에서는 좀 부족한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율은 연 4%. 상환은 1년 동안 나누어 하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조합의 두레 일꾼이 나가 거두어 온다. 현재 조합에서 대출을 받아간 모임은 8개, 금액은 7천만원이 넘는다. 지난 2년 6개월 동안 상환율은 100%에 육박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책임연구원은 국내 빈곤 가구 수를 전체 가구의 3.46%로 추정한다. 여기에 실직·이혼·장애·노숙 같은 사회적 위험에 처한 가구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문제는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효영씨는 저소득층의 자활을 위해 제도권 은행이 나서 주기를 바랐다. “단돈 100만 원이라도 일단 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있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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