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유통업, 피 말리는 ‘영토 전쟁’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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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넘보기’ 공방전 치열…자체 매장 증설·PB 제품 개발로 맞서
시장 물밑에서는 제품을 만드는 이와 제품을 파는 이의 ‘땅 따먹기’가 한창이다. 유통업체들은 ‘바잉 파워’를 무기로 제조업체로부터 시장의 패권을 빼앗아 오는 데 이미 절반쯤 성공했다.

유통업체들은 제조업체의 고유 영역이던 시장 조사, 소비자 조사 등 자체 마케팅 활동을 강화하면서 소비자로부터 로열티를 이끌어냈다. 소비자로 하여금 제품 브랜드를 보지 않고서도 ‘이 유통업체가 파는 제품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제조업체에게는 ‘소비자의 욕구’를 들이밀며 입맛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마켓 파워가 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이동한 것이다.

유통업체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통업체들은 직접 개발한 PB 상품(할인점 같은 대형 소매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상품)을 내놓으며 제조사의 또 다른 영토를 넘보고 있다. 소비자가 유통업체를 믿어주는데(스토어 로열티), 제품 개발이라고 못하겠느냐는 기세다.

PB를 무기로 제조사의 ‘땅 따먹기’ 선봉에 선 유통업체는 신세계 이마트. 1997년부터 PB 상품을 선보이기 시작한 이마트는 현재 3천5백여 가지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자체 개발한 상품 가짓수가 웬만한 제조업체의 그것보다 많다. 현재 이마트 전체 매출 가운데 12%는 직접 개발한 상품에서 나온다. 마케팅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는 PB 상품은 다른 상품보다 평균 가격이 30~40% 가량 싸기 때문에 시장에 진입하기가 쉽다.

휴지·우유 등 1회성 소비재 상품에서 시작한 이마트의 PB 상품 브랜드 ‘이플러스’는 영역을 넓혀 소비재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처음에는 가격 경쟁력에 주력했지만, 최근에는 기술력·디자인·소재·품질력까지 고루 갖춘 경쟁 상품으로 진화하는 추세다. P&G나 매일유업 등 메이저 제조업체들까지 제품을 생산해 이마트 PB 상품으로 납품할 정도다.

이마트에서 숍인숍 형태로 출발한 PB 브랜드 ‘자연주의’는 연평균 40%씩 꾸준히 성장하면서 생활 문화 토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자연주의라는 이름표를 달고 판매되는 제품만 2천5백 가지가 넘고, 이마트가 자연주의 제품으로 올해 거두어들인 매출액은 8백억원이 넘는다. 자연주의 매장에서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그 제품을 만든 제조사 이름 따위는 관심도 없다. 이마트가 만든 ‘자연주의’에 대한 신뢰감이면 족하다.

이마트의 의류 PB 브랜드인 마이클로와 이베이직은 진열된 상품의 90% 이상이 시즌에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누린다. 웬만한 의류 브랜드가 상설 할인 매장까지 거쳐야 생산량의 절반이 소진되는 점을 감안하면 눈부신 실적이다.
‘이플러스’ ‘자연주의’ 앞세운 이마트가 선봉

이런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이마트는 최근 프리미엄급 PB 제품을 내놓으며 PB 상품을 일반 라인과 프리미엄 라인으로 이원화했다. 할인점이라고 해서 값싼 브랜드로만 승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른 제조사들이 쓰는 전략과 마찬가지로 고가와 저가 제품을 함께 가져가겠다는 방침이다.

편의점·슈퍼마켓·백화점 체인으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LG유통이나 롯데마트, 세븐일레븐 역시 PB 상품 개발에 적극적이다. LG유통의 편의점 LG25가 자체 개발한 PB 상품은 현재 2백 가지가 넘는다. 이 회사 매출의 10% 이상이 ‘함박웃음’과 같은 PB 상품에서 나오고 있다. 롯데마트나 세븐일레븐도 ‘와이즐렉’이라는 PB 브랜드를 만들어 매장 내 PB 제품 비중을 늘려가는 중이다.

유통업체들은 선진국 사례를 들며 PB 상품 비중을 더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신세계 유통연구소 노은정 과장은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 편의점이나 할인점은 PB 상품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심지어 PB 상품만으로 채워진 백화점까지 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PB 상품 개발이 이제 걸음마 단계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가구·가전 제품을 포함한 모든 생활용품이 유통업체의 PB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제 영역을 침범해오는 유통업체의 야심을 보며 제조사들도 앉은 자리에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불황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PB 상품에 대한 반응이 높아지자 제조사들의 발걸음은 더욱 재졌다. 제조업체의 대응 ‘무기’는 자체 유통망 강화. 유통업체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자사 제품을 팔 수 있는 독자적인 채널을 가지고 유통업체와 대등하게 겨루겠다는 것이다.

제조사와 유통사의 주도권 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전업계를 보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전제품 열 가운데 아홉은 제조사의 대리점을 통해 판매되었다. 그러나 할인점과 전자제품 전문점이 세를 늘리면서 대리점의 영향력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유통업체들은 바잉 파워를 앞세워 원하는 모델과 가격에 맞춘 ‘맞춤 생산’을 제조업체에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입김이 세졌다. 반대로 가전사의 대리점은 하나둘씩 문을 닫으며 영향력을 잃었다.

팔다리나 마찬가지인 자체 유통망이 급격하게 축소되는 데 위기 의식을 느낀 가전업체들은 지난해부터 자체 유통망 강화에 사활을 걸고 대리점 수를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유통사와 대등한 힘을 갖지 못하면 제조사는 유통업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장기 전략을 가지고 제품을 개발하거나 육성하기 어렵다. 최근 대리점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시장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전략이다”라고 말했다.

가전업체들은 대리점 수를 늘리기 위해 대리점에 임차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1년 동안 새로 늘린 대리점 수만 100개가 넘는다. 매장 수를 늘리는 동시에 기존 매장은 평수를 늘려 고급화·대형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생활·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가전 대리점

가전업체들은 대리점을 늘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차별화 전략을 앞세워 대리점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요즘 가전 회사의 대리점은 단순히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가전제품만 파는 곳이 아니다. 모든 대리점이 A/S 서비스 체제를 구축한 것은 물론 헤어드라이어·면도기 등 중소기업 브랜드의 소형 가전이나 간단한 사무용품도 같이 판다.

또 생활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휴식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복합 생활 문화 공간으로 바뀌었다. 편의점처럼 무인 민원 발급기나 현금지급기가 있는 대리점이 있는가 하면, 홈시어터 시스템을 이용해 DVD를 관람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커피숍 스타벅스가 매장 안에 들어와 있는 삼성전자 대리점이 있는가 하면, LG전자 대리점 가운데는 ‘총각네’ 채소 가게가 들어와 장을 본 주부가 가전제품 쇼핑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삼성전자 대리점들은 지역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며 각종 이벤트나 행사도 연다. 농수축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거나, 주부들을 초청해 김장 컨테스트를 열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 경진 대회를 개최한다. 최근에는 입시 학원과 연계해 입시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삼성전자 유통전략그룹 조영욱 과장은 “할인점이나 전자제품 전문점에 비해 대리점 판매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차별화한 서비스로 대리점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유통 파워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가전업체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던 화장품업체들도 최근 자사 제품을 주도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독자적인 유통 창구를 개척하고 있다. 미샤나 더페이스가 일반 유통이 아닌 프랜차이즈 형태의 전속 유통망으로 성공한 것도 자극제가 되었다. 국내 최대 화장품 기업인 태평양은 휴플레이스, LG생활건강은 뷰티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브랜드 숍 매장을 늘려 가고 있다. 올 한 해 휴플레이스는 3백개, 뷰티플렉스는 40개가 문을 열었다.

엄격하게 따지면 휴플레이스나 뷰티플렉스는 태평양이나 LG생활건강의 전속 유통 매장이라고 할 수 없다. 기존 화장품 가게에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한 브랜드로 통일한 매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플레이스나 뷰티플렉스에서는 태평양이나 LG생활건강의 제품만 취급하지 않는다. 적게는 40%에서 많게는 60%까지 수입품이나 타사 제품을 진열하고 판매한다. 하지만 휴플레이스에서는 태평양 화장품이, 뷰티플렉스에서는 LG생활건강 제품이 주도적으로 진열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가전 대리점이 중소기업 제품들을 가져다 제품 구색을 갖춰놓기는 했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는 것처럼, 이들 화장품 매장에서도 태평양이나 LG생활건강 제품이 주도적으로 판매될 수밖에 없다.

이들 화장품 브랜드 숍 역시 다른 유통 채널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여기서는 다른 복합 매장과 달리 무료 피부진단기를 통해 자신의 피부 상태를 자세히 알 수 있고, 전문 뷰티 카운슬러에 의해 각자의 피부에 맞는 피부 관리법과 화장품 사용법을 제공받을 수 있다. 또 무료 테스터 존에서 자유롭게 제품을 사용해보고 예쁜 배경으로 만들어진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등 뷰티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뷰티플렉스 안에는 전문 네일 살롱인 ‘대싱디바’가 숍인숍 형태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화장품·아이스크림·MP3도 ‘소비자 속으로’

독자적인 유통망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가전이나 화장품 업계뿐 아니라 다른 업계로도 확산되고 있다. 아이스크림 기업 (주)한국하겐다즈는 최근 서울 대학로에 국내 최대 규모의 아이스크림 숍을 여는 등 브랜드 숍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1991년 한국에 진출한 뒤 10년 넘게 전문 매장을 5개만 갖고 있던 이 회사는 지난 1년 사이에 점포를 20개로 늘렸다. 2009년까지 2백 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그동안 주로 편의점이나 할인점을 통해 제품을 판매해 왔지만, 앞으로는 자체 브랜드숍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하겐다즈를 모방한 ‘미투’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기존 유통 채널에만 기댔다가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분석에서 나온 것이다.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로 유명한 레인콤도 최근 들어 잇달아 브랜드숍을 열고 있다. 대학로에 아이리버 존이라는 브랜드숍을 연 이래 몇 달 동안 매장을 9개나 열었다. 이 매장에서는 MP3 플레이어를 사거나 수리를 맡기고 남는 시간에 MP3 음악을 내려받아 들을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조사나 유통사 모두 파워게임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면 상대방의 영역을 끊임없이 넘겨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오세조 교수(연세대·경영학)는 “제조사는 제조사끼리, 유통사는 유통사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가고 있다. 제조사는 통제 가능한 유통을 일부나마 가져 가면서 지배력을 유지하려 할 터이고, 유통업체는 PB 상품 개발 등을 통해 힘을 더 키우려 할 것이다. 기업의 경쟁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지만, 소비자는 그만큼 좋은 제품을 더 값싸게 얻을 가능성이 커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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