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터폴 ‘집념의 개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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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살해 용의자 추적기/‘외국 대상 첫 현상 수배’도 한몫
지난 3월25일 중국 지린성 옌지(延吉)시, 경찰청 외사과 소속 이 아무개 주재관은 잔뜩 긴장했다(경찰청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베이징에 파견 근무 중인 그는, 한국인 재소자를 둘러보러 지린성에 갔다가 의외의 ‘대어’를 낚았다. 중국 공안의 협조로 여대생 하양 살인 사건의 용의자 김준기(41·가명)를 체포한 것이다. 사흘 뒤에는 공범 윤상신(42·가명)도 검거했다.

하양 살인 사건은 중요 용의자들이 국외로 달아나면서 미궁에 빠졌었다. 검찰은 자기 사위와 하양의 불륜을 의심한 윤 아무개씨(58)에게 혐의를 두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두 사람을 체포해야만 사건의 실타래를 풀 수 있었다. 그 몫을 한국 인터폴이 해낸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한국 인터폴과 용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숨막혔던 추격전은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되었다.

경찰청 4층에 있는 외사3과 유영진 경위가 추적자로 나섰다. 경찰청 외사3과가 바로 한국 인터폴이다.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 국가 중앙사무국(KNCB). 국제범죄대책반·국제공조반·통신반 등 총 1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경위는 인터폴 국제공조반의 아시아 담당이다.

지난해 3월20일 김준기는 범행 14일 만에 홍콩으로 달아났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4월5일에는 윤상신도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유경위는 윤상신 추적에 집중했다. 윤 아무개씨의 조카인 윤상신이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5월1일 유영진 경위는 인터폴 중앙사무국에 두 사람에 대한 적색 수배(Red Notice)를 요청했다. 적색 수배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체포 영장과 같다. 인터폴 수배서는 전단지(A4 규격)의 오른쪽 모서리 색깔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뉜다. 적색(체포)·청색(동향 감시)·녹색(요주의)·황색(실종자 소재 확인)·검은색(사망자 신원 확인) 등이다. 적색 수배서에는 사진을 비롯해 키·몸무게·머리카락 색깔 등 개인 신상과 범죄 혐의, 체포 후 조처 사항 등 스물여덟 가지 정보가 담겨 있다.

적색 수배서 요청은 인터폴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프랑스 리용에 있는 인터폴 중앙사무국과 1백81개 회원국은 X400이라고 불리는 통신망과 자동검색시스템(ASF)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두 시스템은 국제 범죄에 맞서는 인터폴의 무기다. 국제 공조와 함께 국내 경찰 수사도 활기를 띠었다. 경찰은 전화를 감청해 윤상신의 거처를 확인했다. 윤상신은 동생이 운영하는 베트남의 붕타우 시 봉제 공장에 피신해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지만, 인터폴 수사는 한계에 봉착했다. 인터폴은 독자적인 수사권이 없다. 정보를 제공하고 협조를 요청할 뿐 검거는 현지 경찰에 의존해야 한다. 현지 경찰이 손을 놓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한국 인터폴은 승부수를 띄웠다. 국외 도피 사범에게는 처음으로 현상금을 내걸기로 했다. 하지만 벽에 부딪혔다. 경찰청 훈령이 외국인에게 현상금이나 보상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기 때문. 고심 끝에 한국 인터폴은 관련 규칙 개정을 요구했고, 지난해 5월31일 경찰청은 ‘범죄 신고자 보호 및 보상에 관한 규칙’을 개정했다. 보상금 지급 대상에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을 포함했고, 보상금 한도액도 5백만원에서 천만원으로 늘렸다. 범인 검거에 공을 세운 외국 경찰도 현상금을 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한국 인터폴은 한 사람당 2백50만원씩 현상금 5백만원을 걸었다. 김준기와 윤상신은 현상금이 붙은 국외 도피 사범 1호가 되었다.

당근책인 현상금은 효과를 발휘했다. 베트남 공안부의 수사 태도가 달라졌다. 잠복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수사도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7월10일, 베트남 공안은 윤상신의 은닉처를 덮쳤다. 하지만 윤은 붕타우를 떠나 하노이의 뒷골목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베트남 공안은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고, 하노이·호치민·붕타우 등 주요 도시에 현상 수배 전단이 뿌려졌다. 1차 검거에 실패하자, 유영진 경위가 직접 나섰다. 7월31일 유경위는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8월3일 윤상신의 동생이 호치민 시의 ㅋ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유경위는 결혼식 참석차 출국하는 윤상신 가족 15명을 미행했다. 그들이 눈치챌까 봐 수사 일선에 나선 광주지방경찰청 경찰 2명은 다음 비행기를 타고 합류했다. 결혼식장 주변에는 베트남 공안이 잠복했다. 8월3일 윤상신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귀국한 유경위는 검거 전선을 확대했다. 동남아뿐 아니라 중국에 파견된 주재관에게도 첩보 수집을 다그쳤다. 찌를 드리우고 기다린 지 3개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입질이 있었다. 홍콩으로 도주했던 김준기가 칭다오로 잠입했다는 첩보가 날아왔다. 주춤했던 수사에 다시 속도가 붙었다. 중국은 베트남보다 국제 공조가 수월했다. 중국과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고, 현지에 경찰 주재관 4명이 파견되어 상주하고 있었다(베트남에는 주재관이 없다). 도피처가 중국으로 바뀌면서 담당자도 중국 담당인 이강석 경위로 바뀌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이경위는 중국 현지 주재관을 총동원했다. 중국 공안에게 수배 전단을 보내고, 현상금 지급도 알렸다.

지난해 10월부터 제보가 잇달았다. 김준기가 아파트를 임차해 칭다오에 머물러 있고, 베트남에서 놓쳤던 윤상신도 함께 있다는 제보였다. 지난 1월7일 중국 공안은 김씨가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칭다오 시의 한 아파트를 덮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준기가 도주한 뒤였다.

쫓는 자뿐 아니라 쫓기는 자도 치밀했다. 김준기는 쌍꺼풀과 코를 높이는 성형 수술을 했고, 부러진 앞니도 교체했다. 박한동이라는 위조 호적부(신분증)를 마련했고, 핸드폰 역시 추적이 불가능한 선불 핸드폰을 사용했다. 현상금이 붙은 수배자를 놓치자, 중국 공안은 속이 탔다. 용의자들이 옌지 시로 달아난 것이 확인되자, 옌지 공안 당국은 인해전술을 펼쳤다. 한국인 명의의 핸드폰과 유선 전화 번호를 일일이 파악했고, 옌지에서 한국으로 통화한 모든 기록을 뽑아 일일이 대조했다. 술집 여종업원까지 찾아다니며 이 잡듯이 탐문 수사를 벌인 것이다. 우직스럽게 발로 뛴 덕에 김준기의 소재를 파악했다. 검거 당시 김준기는 자포자기한 듯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고 한다.

지난 4월11일, 추적 1년 만에 두 사람은 국내로 송환되었다. 송환 과정에서 한국 인터폴은 현상금 5백만원(3천8백 달러)을 옌지 공안국에 전달했다. 일부 보도와 달리 현상금은 한국 교민이 아니라 옌지 공안국이 차지했다. 한국 인터폴 이강석 경위는 “교민들의 제보도 도움이 컸지만, 발로 뛴 옌지 공안의 공이 더 컸다”라고 말했다.

현상금 덕을 보았지만, 이번 검거는 ‘범죄자는 반드시 처벌한다’는 한국 인터폴의 집념이 이룬 결과다. 경찰청 자체 훈령을 고치고 수배 전단 30만장을 뿌리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스물한 살 여대생의 죽음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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