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참기름'은 언론이 만들어냈다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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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 정제 과정 이해 못해 부풀려 보도…'악덕업자'로 몰린 제조업자 억울한 피해
지난 8월24일 식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은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다. 참기름 색깔을 내기 위해 옥수수 기름에 황산을 섞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납꽃게 사건 때문에 놀란 가슴이었다. 며칠 뒤인 28일 열린 사회관계 장관회의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납꽃게’ ‘발암물질 함유 묵’ 등과 함께 ‘황산 참기름’을 직접 언급하며 “철저하게 수사한 뒤에 단호히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석 달이 지난 지금, 사건의 장본인인 ‘악덕 업자’는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더구나 문제가 된 황산 참기름 역시 당시 제조 과정 그대로 계속 생산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울산시 울주군에서 (주)신기유업이라는 식용 기름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황규헌씨(43·부산시 남구 감만동)는, 지난 8월22일 오후 회사로 찾아 온 대구 중부경찰서 형사대를 따라 나섰다. 직원들로부터 8월7일 경찰이 제품 샘플을 가져갔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품질에 자신이 있었던 황씨는 설마 별 일이 있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법원이 구속 영장을 발부한 25일 그는 이미 ‘천인공노할’ 악덕업자가 되어 있었다.

경찰에 함께 연행된 공장 기술자의 말 한마디가 사단이었다. 황씨는 “수사관들이 옥수수 기름 제조 공정을 묻다가 정제 기사가 ‘배아(胚芽)를 압착해 기름을 짠 다음 황산을 넣고…’라고 답변한 부분에 이르자 놀란 표정으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식용유 유통업을 하다 직접 공장을 차린 후 생산 관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영업을 주로 담당해 온 그로서는 기술적인 면을 잘 몰라 “공장장이 넣었다면 넣었을 것이다”라는 정도 외에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은 경찰에 의해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을 낸 식용유’로 부풀려졌고, 이를 전해 들은 기자들은 아예 ‘황산 참기름’이라고 요약해 대서 특필했다. 중앙 일간지들도 대부분 ‘참기름 색깔을 내기 위해 식용유에 황산을 섞어…’(<ㄱ일보> 8월24일) ‘…가짜 식품은 비단 ‘납꽃게’ ‘황산 참기름’ ‘방부제 묵’에 국한되지 않는다…’(<ㅅ일보> 8월25일) ‘…꽃게에서 납조각 검출, 식용유에 황산 첨가 사건…’(<ㅈ일보> 9월1일) 등 황
씨가 식용유에 황산을 섞어 가짜 참기름을 만들어 온 것처럼 보도했다.

현행 <식품공전>은, 옥수수 기름(옥배유) 제조 과정에 대한 별도 규정 없이 완제품에 대해서만 산가(酸價)·비중(比重)·굴절률(屈折率) 등 몇몇 조항의 규격을 정해 두고 있다. 다만 <식품첨가물 공전>에 ‘황산 및 이를 함유하는 제제(製劑)는 최종 식품의 완성 전에 중화 또는 제거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어, 황산이 단순한 화공약품이 아니라 식품 가공에도 널리 쓰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름 생산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론서인 (에른스토 베르나르디니, 1983, 이탈리아 인터스탐파 출판사)에도 ‘효과가 뛰어난 최신 기술’의 하나로 ‘황산에 의한 정제법(Purification by Sulfuric Acid)’이 소개되어 있다.

뜻밖에 구속되어 당황했던 황씨의 응원군이 되어준 이는 198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입 쇠기름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상훈씨(52·부산 우양유지 상무이사)였다. ‘우지(牛脂) 라면 파동’으로도 불린 이 사건은, 공업용 쇠기름을 수입해 식용으로 가공했다고 해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미국의 수출업자들이 쇠기름에 매긴 1∼17등급 중 ‘이터블(ea table·식용)’로 명시된 1등급 외에는 공업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검찰과, 그것은 노린내 나는 쇠기름 원유(原油)를 즐겨 먹는 미국인들의 기호를 감안한 가격 분류일 뿐 식용과 공업용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는 식품회사들 간의 공방은, 1997년 대법원의 무죄 확정 판결로 끝났다. 이씨가 중역으로 재직했던 (주)부산유지가 사장과 그가 기소되는 바람에 도산한 지 7년 만이었다.

이씨는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고 있는 후배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이씨가 변호사 사무실을 뛰어다닌 지 며칠 만에 보석으로 풀려난 황씨는, 그에게서 옥수수 기름 제조에 대해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식품공전>은 옥배유를 ‘옥수수 기름’과 ‘옥수수 샐러드유’로 구분하고 있다. 황씨가 생산하는 것은 옥수수 기름이다. 둘을 나누는 여러 가지 규격 중 가장 큰 차이는 색도(色度)이다. 튀김용으로 많이 쓰이는 옥수수 샐러드유가 ‘황(黃) 35, 적(赤) 3.5 이하’로 정해진 것과 달리, 옥수수 기름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다. 샐러드유보다 진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고의로 색소 등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정제를 위해 당연히 거친 황산 처리 공정을 두고 ‘황산을 첨가하여 참기름 색깔을 냈다’는 혐의를 씌운 것은 수사기관의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그는 “샐러드유는 정제 과정에서 인산(燐酸)을 사용하고 탈산(脫酸)을 위해 가성소다를 사용한다. 다른 공법으로는 초산(醋酸)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정제 과정을 문제 삼는다면 모든 식용유를 ‘양잿물 식용유’나 ‘초산 식용유’ 혹은 ‘황산 식용유’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씨는 지난 11월15일 대구지방법원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가 지난 5년간 6개월마다 실시한 한국식품공업협회의 검사에서 양호한 판정을 받은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번에는 기준을 초과한 만큼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경찰이 분석 의뢰한 옥수수기름 샘플이 산도 1.2 비비누화율(굳기름 비율) 2.9(기준치 2.0)로 각각 0.6과 2.0인 기준치를 벗어났던 것이다. 기준을 초과한 산도(酸度)는 황산이 아니라 원료유가 함유한 유리지방산(遊離脂肪酸) 함량을 말한다. 황산 참기름으로 시작된 파문이 재판에서 ‘식품기준 위반 사건’으로 뒤바뀐 것이다.

황사장은 자기 부부가 중국에 출장 중이던 때, 여름 휴가를 하루 앞둔 직원들이 작업을 소홀히 해 일어난 사고라면서 “최종 책임이 있는 회사 대표로서 처벌을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0월10일부터 공장을 다시 가동한 신기유업은 거래선이 대부분 끊겼다. 미국 바이어와 50t 규모의 참기름 수출 계약을 맺고도 금융기관이 등을 돌려 잔여 물량 33t을 대지 못해 도산 직전이다. 집에도 ‘살인마’ ‘악덕업자’라고 성토하는 시민의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와 고3 수험생인 맏딸 등 온 식구가 고통을 받았다. ‘아직도 1차 산업, 그것도 까다로운 식품제조업을 붙들고 있는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 뿐’이라는 한마디가, 황씨가 사건을 겪고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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