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연쇄 살해 ‘버팔로 신발’ 의 정체는?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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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상대 연쇄 살인극, 동일범 소행 의심…부유층 증오 범죄 가능성도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힘 없는 여성들을 차례로 죽이는 살인마의 이름은 버팔로 빌이었다. 요즘 이 버팔로라는 이름이 현실의 연쇄 살인 사건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사람 이름 대신 신발 이름으로 나타났다.

지난 11월18일 2시께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한 주택에서 화재가 났다. 불은 침실만 절반 정도 태우고 저절로 꺼졌다. 출동한 119 구조대원들은 이 집에서 살던 노인 김 아무개씨(86)와 파출부(57)의 반쯤 탄 시체를 발견했다. 이들은 불에 타기 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으로 밝혀졌다. 9월 이후 서울에서만 벌써 네 번째 터진 노인 상대 살인 강도 사건이었다.

11월28일 혜화동 사건 현장. 죽은 김씨네 2층 단독주택은 노란색 출입제한 띠를 두른 채 흉가로 변해 목격자 현상금을 내건 포스터만이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이웃들은 같이 살던 큰아들 내외가 함께 집을 떠났다고 말했다. 숨진 김씨의 아들은 출판사 사장이며 며느리는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유족 주변의 한 관계자는 고인의 이름으로 된 재산은 없고 모두 자식(3남4녀)에게 물려주었다고 전했다.

김씨가 살던 혜화동 26번지 골목 일대는 100평이 넘는 집들이 연이어 붙어 있었다. 서울시장 공관과 한 국회의원 집도 가까이 있다. 대부분 문에 ‘세콤’이나 ‘캡스’와 같은 사설 경비업체 마크가 붙어 있었다. 김씨네 집은 이웃집과 달리 담이 낮아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보였지만 사설 경비업체 표지는 없었다. 근처 파출소의 한 경찰관은 “그 분(피살자)이 나이가 많아 출입할 때 경보기 끄는 걸 잊곤 했다. 그래서 우리들이나 경비업체 직원이 헛출동을 자주 했다. 식구들이 미안했는지 몇달 전부터 아예 사설 경비 시스템을 해지했더라”고 말했다.

혜화동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동대문경찰서 강력반은 캐주얼 구두 두 짝을 구입해 사무실에 전시해놓고 있다. 강력반 형사는 “현장에서 발자국 수십 개를 발견했다. 이 중 소방대원 것을 제외하고 남은 발자국의 문양을 조사해보니 이 신발의 바닥 문양과 일치했다”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ㄱ사가 생산하는 ‘버팔로’ 캐주얼화였다.

이 신발 자국은 한 달 전인 10월16일 서울 삼성동에서 발생한 또 다른 노인 살인 사건 때 발견된 자국과 같은 것이다. 버팔로 신발 자국을 계기로 경찰 주변에서 ‘연이은 노인 상대 강도 살인이 동일범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 최근 4건의 노인 상대 강도 살인 사건은 우연치고는 너무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은퇴한 노인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고, 정원이 있는 2층 단독 주택만 골랐다.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뒤 현장에 흉기를 남기지 않았다.
혜화동과 삼성동 사건에서 공통으로 발견된 범인의 발자국은 275mm(실제 길이는 295mm 정도 된다)로 크기도 비슷하다. 구기동 사건 현장에서 나온 신발 자국은 버팔로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으나 비슷한 문양이다.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정말 동일인이라면 수사는 더욱 어렵게 된다. 범행 동기를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수사관은 “범행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이번 수사의 첫 번째 목표다’라고 말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때는 그래도 성폭행을 은폐한다는 이유라도 있었는데, 이번 사건은 도무지 살해 동기를 알 수 없다. 강도 목적으로 침입했다가 들켜서 목격자를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다. 사람을 죽인 기술이 너무나 완벽하고, 본업이라 할 도둑질은 너무나 어설픈 것이다.

9월 신사동 살인 사건에서 범인은 안방 장롱과 경대 서랍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장롱에 있던 현금 2백80만원과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가 담긴 귀금속 보석 상자는 손대지 않았다. 구기동 사건의 경우 옷장에 6백만원 가량 현금이 있었지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삼성동 사건의 경우 뒷문 앞에 발자국이 모여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달아나려 한 흔적이다. 범인은 시간에 쫓겨 금품을 챙기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혜화동 사건의 경우 범인은 2층 금고를 열려고 곡괭이로 여러 차례 긁었으나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범인들은 물건 찾는 실력이 없었거나, 시간 부족, 또는 금고 따는 능력 부족 등의 이유로 네 차례 살인극을 벌이는 동안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토록 도둑질에 우왕좌왕했던 범인은 사람을 죽이는 데만큼은 굉장히 능숙했다. 구기동 사건 현장에 놓인 시체의 위치는 범인들이 목격자와 마주치는 족족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2층에서 건장한 36세 아들도 죽였다. 혜화동 사건 때는 시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증거를 은폐하려고 했다.

노인 상대 연쇄 살인극이 예전 지존파 사건처럼 부유층을 증오하는 정신병리학적 범죄라는 주장도 있다. 피살자들은 전형적인 서울 중산층이었다. 신사동 사건 피살자는 대학 교수, 구기동은 자영업자, 삼성동은 군납업체 대표이사 사장의 부인이었다. 범행 지역은 강남구와 종로구 북부. 누구나 부촌으로 떠올리는 곳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회적 증오가 낳은 범죄라면 왜 서투른 강도 시늉을 했는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사건을 수사하는 한 경찰 간부는 “아직 단일범 소행으로 볼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단일 수사본부를 만들어야 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수사팀의 다른 한 형사는 “개인적으로 연쇄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서가 있어서 조만간 수사가 급진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화회사 마케팅 담당자는 범행 현장 발자국과 관련해 “버팔로 신발은 주고객이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 남성이며 연간 판매량이 30만족(짝) 정도다”라고 말했다. 버팔로 신발 발자국이 범행 현장에서 연이어 발견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범행 당일에 이 신발을 신고 있던 수상한 사람을 눈여겨 보아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경찰이 내건 현상금은 천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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