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정두영의 잔혹 행각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05.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쇄살인범 정두영, 백주에 제집 드나들 듯…무인경비장치•CCTV도 무용지물
부자들이 위험하다. 부유층을 노리는 범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전과 같이 생계를 위해 저지르는 범죄보다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사업형’ 범죄가 늘고 있다. 또 범법자들은 부유층이 달아놓은 첨단 경비 장치를 비웃으며 그 빈틈을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4월12일 천안시 원성동에서 인질극을 벌이며 돈을 요구하다 검거된 정두영씨(32)의 강도 행각은 수사를 했던 경찰마저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보통 도둑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씨는 일반 범죄자가 밤에 활동하는 것과 달리 출근하듯이 아침과 대낮에 버젓이 부유층 집을 골라서 털었다. 또 범행이 발각되면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먹?야구방망이?쇠망치?식칼을 휘둘러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정씨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4월12일까지 9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모두 3억2천만원어치(벤츠 차량 포함)를 훔쳤다.

목돈 만들 사업 대상으로 부유층 선택

경찰과 범죄 전문가들은 정씨의 범죄 행태를 1994년 지존파와 1996년 막가파와는 다른 유형으로 분류한다. 막가파와 지존파는 부유층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 때문에 외제차나 고급 승용차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살인 공장’으로 납치해 살해했다. 이들이 돈보다 부유층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것에 비해 정씨는 부유층을 자신의 ‘사업’ 대상으로 보았다. 그간 흔히 있었던 단순 생계형 범죄가 아니라 범죄를 통해 목돈을 만들겠다는 사업형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른 것이다.

정씨는 지난해 3월 출소한 후 강도짓으로 수십 억원을 벌어 큰 규모의 게임방을 하려는 사업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자기도 부자로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1년 만에 3억원어치를 털어 그중 1억 원 이상을 저금해 놓고 있었다. 술ㆍ담배를 하지 않는 그는 일반 범죄자와 달리 벌어들인 돈을 유흥비로 전혀 쓰지 않고 통장 2개에 착실히 보관해 놓았다. 동거녀 박 아무개씨(21)에게도 7천여만원이 든 통장을 만들어 주었을 정도로 돈 관리에 철저했다. 동생이 훔친 금품을 처분했다가 장물 취득 혐의로 구속된 정씨의 형(38)은 “동생이 출소후 어머니 제삿날 형제들이 모였을 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말했는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거녀와 장인 장모에게도 착하고 건실한 사업가로 보였다.

정씨가 범행 대상으로 찍은 집들은 대부분 대로변 고급 주택이었다. 정씨가 4월8일 마지막 살인을 저지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DCM철강 정 아무개 회장(76) 집은 온천동 파출소에서 200m도 떨어지지 않은 너비 2차선 정도의 소방도로 네거리에 위치한 주택이다. 정씨가 3월11일 야구방망이로 가정부 등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부산 서대신동 현장은 바로 집앞에서 두세 명의 행상이 생선과 야채를 팔고 있을 정도로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소방도로 네거리에 있다. 평범한 도둑 같았으면 감히 범행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집들이었다.

정씨는 여기에 한술 더 떠 서대신동에서는 사람을 살해하고 그 옆에서 현장에 있는 아령으로 1시간 동안 철제 금고를 부수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또 DCM 회장 집에서는 살인을 하고 버젓이 그 집에서 잠을 잤으며, 벤츠를 훔치기 위해 벤츠 앞에 주차해 있는 다른 차를 집 밖으로 빼놓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벤츠를 몰고 나가기도 했다.

특히 정씨는 ‘무인경비시스템이 장착된 집은 부잣집’이라고 판단해 시스템이 달려 있는 집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이런 집들이 낮에는 대개 경비시스템 전원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알고 마음 놓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낮에 시스템을 켜놓으면 적외선 센서가 가입자도 범죄자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출입할 때마다 카드로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이용자가 대부분 경비시스템의 전원을 꺼놓는데, 정씨는 이를 거꾸로 이용했다. 정씨에게 강ㆍ절도를 당한 피해자 집들 열세 곳 가운데 열곳이 무인경비시스템을 장착해놓고 있었다.

정씨가 이처럼 도로변 저택을 범행 장소로 삼은 것은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먹잇감’을 물색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차를 몰고 부산은 물론 마산ㆍ울산ㆍ천안 등 전국을 누비면서 범죄를 저질렀다. 범죄예방연구소 곽대경 박사는 “현대 범죄의 전형적인 특징인 전국화ㆍ지능화ㆍ복합화(강도ㆍ살인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를 그대로 보여준다”라고 분석했다.

정씨가 천안에서 검거되지 않았다면 그는 전국에서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4월12일 그를 검거한 천안경찰서는 부산에서 올라온 용의자 몽타주를 기억하고 부산 서부서에 전화 연락을 했다. 천안서는 정씨가 가지고 있던 수표가 DCM 회장집에서 도난당한 수표임을 확인하고 정씨의 신발 크기와 족적 등을 확인했다. 천안서의 이같은 기지로 정씨가 저질러온 광란의 범죄가 막을 내린 것이다(46쪽 상자 기사 참조).

서부경찰서와 부산경찰청은 부산 서구?동래구?연제구ㆍ수영구와 마산ㆍ울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범행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생각하지 못해 수사 공조와 초동 대응에 소홀했다. 서부서 한 관계자는 “서구에서 일어난 사건은 수법이 비슷해 동일범 소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칼로 살인한 온천동 사건이나 울산ㆍ마산 등 다른 지역 사건을 한 사람의 범행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특히 정씨는 흉기를 소지하지 않고, 범행할 때는 반드시 장갑을 끼며, 수표와 피묻은 옷을 태우는 등 증거 인멸에 철저했다. 또 자신을 본 증인을 살려두지 않고 피해자 신발을 신고 범행을 저질러 경찰이 범인 수가 몇 명인지를 모르게 해 이번 사건은 자칫하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CCTV 카메라 믿다 수사 어려움 겪기도

정두영씨가 검거된 후 부산 서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정씨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려고 서울 성동경찰서에서 형사가 내려온 것이다. 지난 4월4일 관내인 옥수동 옥수하이츠아파트에서 일어난 효성그룹 문고문(65) 부부 살인 사건을 성동경찰서는 보름이 넘게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 정씨가 서울에 원정을 와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부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정씨는 서울에 간 적이 없었고, 정씨 머리카락은 범행 현장에 남아 있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성동서가 한 달 넘게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파트 CCTV만 너무 믿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찰은 초동수사 때 아파트 CCTV의 녹화 테이프 6개를 분석해 주민 이외의 30여명을 확인하는 데 수사를 집중했다. 경찰은 CCTV에만 수사를 집중하다가 이틀이 지난 4월6일에서야 계좌 추적?주변인 조사 등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피해자가 살았던 옥수동 하이츠 아파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층계식 고급 아파트이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CCTV 카메라(모델명:삼성SB D912)가 하나 있고, 엘리베이터 안 문 옆 오른쪽에 같은 카메라가 하나 더 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두 곳에 달려 있는 카메라의 촬영 간격은 2.7초여서 출입자를 빠짐없이 촬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103동 주민 가운데 8명이 경찰이 들고온 CCTV 자료에 자신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해 CCTV의 맹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도 초단인 문고문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어 면식범으로 추정되는 범인(들)은 CCTV의 위치를 미리 알고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등을 보이면서 현관에 들어섰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계단에는 CCTV가 없어 현관만 벗어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성동경찰서는 지난 4월5일 CCTV 녹화 테이프에서 확인되지 않은 부부와 남자의 뒷모습을 잡아내고 각각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소득은 없었다.

성동경찰서 고위 관계자는 “초기 수사를 CCTV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고 80여명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사건을 추적해 왔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후 1주일이 4월12일 성동서는 현장 검증을 다시 실시하고 관리사무실에서 CCTV 녹화 과정 전반을 다시 점검함으로써 초동 수사에 허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인했다. 이 아파트 관리소의 한 관계자는 “CCTV 2개로 모든 출입자를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완벽한 방범ㆍ방재 시스템을 갖추려면 몇백만원을 들여도 모자란다”라며 아파트 방범 시스템의 한계를 시인했다.

지난 3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한 아파트단지에서 일어난 중학생 엘리베이터 살인 사건도 현관 CCTV에 잡힌 범인의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찰은 용의자가 입은 교복의 특징과 헤어스타일만을 가지고 어렵게 탐문 수사를 한 끝에 3일 만에 피의자를 검거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서대문경찰서 강력반의 한 형사는 “준공한 지 1년도 안되는 아파트의 CCTV에 찍힌 사진인데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 보정에 보정을 거듭했으나 수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범인이 중학생이고 치밀하지 못해 검거할 수 있었지 만약 주도면밀한 성인 남자였다면 CCTV 화면만으로는 검거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는 이처럼 날로 지능화하는데 우리의 범죄 예방 의식은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고, 각종 방범 장치도 아직은 비슷한 수준이다. 경비 회사 에스원에 따르면, 전국 가구와 법인 가운데 단 1.3%인 31만명의 계약자만이 범죄 예방 서비스를 받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관련 업계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이다. 시민 대부분이 방범을 의존하는 경찰도 강력 사건 발생후 범인을 검거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지 범죄 예방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