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그룹 고문 살해 사건 의혹 추적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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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그룹 고문 살해 용의자 교통사고로 숨져…유가족, 경찰 수사 결과에 반발
용의자는 밝혀졌다. 하지만 그의 자백을 받지는 못한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도 숨졌고, 아직까지 목격자도 없다. 남은 것은 정황과 증거뿐. 지난 4월3일 발생한 효성그룹 고문 문도상씨(65)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권 아무개씨(41)가 경찰에 검거되기 전 교통 사고로 숨졌다. 경찰은 숨진 권씨를 이 사건의 주범이자 단독범이라고 발표했다.

경찰 수사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5월16일 문씨의 전화 기록을 조회한 결과가 나오면서 수사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용의자 권씨가 3월28일 문씨 집에 전화한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권씨의 핸드폰 통화 내역을 조사해, 사건 당일 문씨에게 오후 7시10분께까지 수 차례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5월18일 권씨의 소재를 찾아 나선 경찰은 검거하는 데 실패했는데, 권씨는 5월20일 오전 1시 50분께 교통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DNA 검사만으로 범인 단정

경찰이 추정하는 권씨의 범행 동기와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86년과 1990년 한 차례씩 문씨의 부동산 거래를 중개했던 권씨는 최근 들어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부동산 투자를 권유하기 위해 4월3일 오후 7시40분께 문씨 집을 방문했다. 그는 투자를 권유하다가 문씨가 거부하자, 우발적으로 주방에 있는 칼로 부부를 위협했다. 권씨는 안방 화장실로 부부를 끌고 가 와인 병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칼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는 문씨의 목 부위를 두 차례, 부인 천시자씨(57)의 목 부위를 여섯 차례, 허리 부분을 한 차례 찔렀다. 이 과정에서 권씨는 반항하는 문씨 부부와 다투다가 다쳤다. 그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수건으로 닦고, 찻잔과 와인 잔의 지문을 지웠다. 건넌방에 들어가서는 피 묻은 옷을 벗고 문씨 집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화장실에서 그는 피를 닦아내려고 몸을 씻었다. 피 묻은 옷은 가방에 담고 범행에 사용한 칼과 자신의 피가 묻은 수건은 현장에 놓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은 권씨는 밤 9시께 계단으로 내려와 어느 층에선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내려오는 도중 급한 나머지 자기 얼굴이 CCTV에 찍히는 줄도 모르고 층수를 나타내는 엘리베이터 번호판을 바라보았다. 권씨는 경찰이 수사망을 좁혀오자, 눈치 채고 5월18일 종적을 감추었다. 그 날 그는 안산에 사는 처남을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는 5월20일 새벽 중부고속도로 오창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갓길에 주차되어 있던 트레일러를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1차선으로 달리던 그가 차선을 연거푸 바꾸어 3차선 갓길에 정차되어 있던 트레일러에 충돌한 것이다. 경찰은 사고 원인을 졸음 운전, 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이 숨진 권씨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유전자 감식 결과이다. 성동경찰서 김영일 형사과장은 “국과수 검사 결과 권씨의 혈액형과 DNA가 현장에서 발견된 혈흔과 일치한다. 이 이상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또한 사건 당일 권씨가 핸드폰으로 옥수동 집 근처에서 문씨와 통화한 기록도 중요한 증거로 제시했다. CCTV에 찍힌 용의자의 모습도 권씨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김과장은 “권씨 손에 난 상처를 가까운 동료들이 보았다고 진술했다”라며 권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은 공범 여부를 조사 중이지만 아직까지 혐의를 둘 만한 사람은 없다며 단독범으로 단정했다.

권씨 유가족은 경찰의 이같은 발표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부인 김 아무개씨는 경찰 발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범행 동기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씨가 빚에 쪼들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사채업자 누구도 우리 집으로 찾아온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이 4월 초에 눈에 띄는 외상을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팔등에 상처가 난 것은 5월 초라고 기억했다. 김씨는 “5월1일, 근로자의 날이어서 나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쉬었다. 남편이 아들 자전거 체인을 고치다가 약간 긁혀 상처가 났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범인이 2명이라더니…

그런데도 경찰이 집으로 찾아오자 남편이 도피한 이유는 집행유예 기간이므로 피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김씨에 따르면 5월18일 권씨는 처남과 술을 마시면서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씨가 경찰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이유는 경찰의 ‘어설픈 수사’ 때문이다. 경찰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현장에서 금품이 없어지지 않은 점을 들어 처음에는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고 추정했다. 와인 잔과 찻잔이 각각 2개, 식탁의자 4개가 심하게 흐트러져 있는 점을 들어 범인이 2명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범행 현장에서 피가 묻은 275㎜와 235㎜짜리 족적을 발견해 경찰은 남녀 두 사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경찰은 조사를 다 마친 뒤에 작은 발자국은 양말 앞부분만이 찍힌 동일인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범인이 단독범이라며 처음의 주장을 뒤집었다. 부인 김씨는 CCTV 사진에 찍힌 사람도 남편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반발했다. 권씨는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가운데 가르마를 타지 않고, 구레나룻도 기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사 관계자는 “CCTV 사진에 무슨 구레나룻이 보이느냐? 그렇게 세밀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까운 사람들이 권씨라고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경찰 스스로 CCTV 사진이 세밀하지 않다고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경찰은 카메라에 찍힌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판단한다. 권씨가 오후 7시45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고, 범행 뒤 밤 9시1분에 내려왔다고 본다. 이같은 경찰의 단정은 범행 시간과 관련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유족은 경찰이 결정적인 증거로 삼고 있는 유전자 감식 결과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문씨 부부 손톱 밑에서 발견된 혈흔은 너무 적어서 유전자 감식에 실패했다. 또한 화장실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역시 모근이 없어 유전자 감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수건에서 추출한 혈액이 권씨 시신에서 채취한 혈액과 조직의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지만 부인 김씨는 남편이 피를 흘릴 정도로 다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가까운 이웃 주민도 권씨가 4월 초에 붕대를 감은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유가족의 줄기찬 문제 제기에 대해 수사 관계자는 “손에 상처가 나지 않았다면 코피라도 흘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사 관계자는 3천5백만분의 1밖에 오류가 나지 않는 명백한 증거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느냐고 확신했다. 경찰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한 법의학자는 “미국의 오제이 심슨 사건처럼 유전자 검사 결과만으로 범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정황 증거까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씨의 핸드폰 통화 기록을 갖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에는 무리다. 권씨가 현장에는 있었으나 살인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찰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부인 김씨는 5월26일 성동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품고 있는 의혹들을 하나씩 제기했다. “범행 시간마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똑 부러지게 설명해 달라”고 김씨는 수사관계자에게 물었다. 김씨는 “수사 관계자가 수사 기밀이라며 제대로 답변해주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용의자와 피해자가 모두 숨진 이번 사건은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양쪽 유가족 모두에게 의문점만 남긴 채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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