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힘 이용해 생색낸 ‘영감님’
  • 속초·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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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 전 속초지청장 주최 ‘디너쇼’ 뒷말 무성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에는 무궁화 4개짜리 켄싱턴호텔이 있다. 설악산 지구에서는 설악파크(무궁화 5개) 다음으로 좋은 호텔이다. 지난해 12월17일 저녁 6시쯤, 평소 한적한 편인 이 호텔 앞마당에 고급 승용차가 몰려들었다. 대부분 부부 동반으로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컨벤션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6시30분부터 열리는 ‘소년 소녀 가장 돕기 사랑의 디너쇼’를 보러온 관람객들이었다.

3만원씩(부부 동반이면 6만원) 주고 산 입장권을 내고 컨벤션 홀에 입장하자 춘천지방검찰청 속초지청 한희원 지청장(40·2월20일 대검연구관으로 전보)이 그들을 맞았다. 2백70여 좌석이 거의 채워지자 한지청장이 간단히 연설한 후 최진희씨 등 인기 가수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호텔 종업원들은 1만5천원 정도 하는 스테이크 요리를 각 테이블에 제공하였다. 소년 소녀 가장이 10여 명 앉은 테이블에도 스테이크가 올랐다.“검찰의 찬조금 요청 거절할 사업가 없다”

그러나 상당수 관람객은 입장권 구입과 별도로 수십만원대 찬조금을 냈다. 사업가는 사업가 단체, 의사는 의사 단체, 약사는 약사 단체를 통해 사전에 액수를 통일한 뒤 대개 같은 액수의 찬조금을 내놓았다. 한 소식통은 “속초지청은 입장권은 물론이고 찬조금 갹출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 사회에서 검찰이 좋은 일을 한다는데 입장권은 물론이고 찬조금을 외면할 정도로 배짱 있는 사업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업체를 가진 사람들은 30만∼50만 원씩 찬조금을 내놓았다”라고 말했다.

대개 호텔은 대관료(貸館料)를 받지 않기 때문에 주최측은 음식비만 지불하고 행사를 치를 수 있다. 따라서 속초지청은 입장권을 판매해 4백만원 정도(1만5천원×2백70명=4백5만원)를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행사 준비 비용을 제하더라도 3백만원 정도는 남았을 것이다. 찬조금 액수는 추정하기 불가능한데, 1인당 10만원씩 냈다고 가정해도 2천7백만원(10만원×2백70명)이 된다. 속초지청은 이 돈의 일부로 선물을 마련해 행사장에 온 소년 소녀 가장에게 제공했다. 12월23일 강원도 고성군 알프스 스키장에서 이 아이들과 1박2일로 가진 ‘소년 소녀 가장의 밤’ 행사에서도 일부를 지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사저널>은 디너쇼를 열어 마련한 금액과 그 사용처를 알기 위해 한희원 지청장을 만났다. “속초지청의 디너쇼 행사에 대해 지역 여론이 좋지 않아 찾아왔다”라는 기자의 말에, 한지청장은 “그것은 각자 가치관의 문제니까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돌아가 달라”라고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한지청장은 “내가 처음 취임했을 때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속초지청에 적립된 기금이 1억5천만원 정도였으나 지금은 3억원 정도로 불어났다. 디너쇼는 이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고, 이 기금의 일부로 소년 소녀 가장을 도왔다”라고 덧붙였다.

속초지청이 디너쇼를 한 바로 다음날 이 지역 한 봉사 단체도 소년 소녀 가장의 밤 행사를 가졌다.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회원들이 월 만원씩 낸 회비를 1년 동안 모은 3백60만원(30명×만원×12개월)에 약간의 찬조금을 보태 4년째 이 행사를 치러 왔다. 장소는 속초농협의 협조로 강당을 공짜로 빌리고, 무대 시설은 속초시청 여성복지과 지원을 받아 무료로 꾸몄다. 식사는 식당을 하는 회원이 준비했고, 행사는 회원과 아이들이 어울려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행사 후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는 점퍼와 라면 한 상자, 생필품 등이 선물로 제공되었다.

같은 목적의 행사였지만 봉사 단체 행사에는 전혀 뒷말이 없었으나, 속초지청 행사에는 뒷말이 많았다. 공공기관이 주최한 행사에 대해 뒷말이 많으면 지방 의회나 검찰이 나서서 조성한 자금의 사용처를 조사해야 한다. 만약 속초시청이 이런 행사를 가져 뒷말이 많았다면 속초지청이나 속초의회는 지체 없이 뒷조사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너쇼 주관자인 속초지청은 물론이고 속초의회도 디너쇼가 과연 적절했는지 조사하지 않았다.

디너쇼에 대해 뒷말이 많은 것은 1차적으로는 속초지청의 홍보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속초지청은 이 행사를 앞두고 속초 시내 곳곳에 이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을 여러 날 내걸었다. 속초 시내 한복판에 있는 뉴스 전광판을 통해 한지청장의 동정과 함께 이 행사를 알리는 뉴스를 여러 번 내보내 빈축을 샀다. 디너쇼 하루 전인 12월16일에는 <강원도민일보>에 이 행사를 알리는 5단 광고까지 실었다(아래 사진).디너쇼 광고비, 신문사·건설회사가 부담

신문 광고는 디너쇼 주관 기관이 춘천지검 속초지청과 범죄예방위원회 속초시협의회(회장 이규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검찰이 공금을 들여 디너쇼 개최 광고를 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인지 광고 말미에는 ‘이 광고는 강원도민일보사와 속초 대명종합건설의 협찬으로 게재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광고비를 속초지청이 아니라 <강원도민일보> 등이 부담했다는 뜻이다.

이 광고에서 속초지청은 ‘연말을 맞아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의 일환으로 소년 소녀 가장 돕기 기금 마련 디너쇼를 연다’고 디너쇼 목적을 밝혔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이란 97년 8월 김태정 검찰총장이 시작한 검찰 역점 사업이다. 이 운동을 통해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검찰’을 만들겠다는 것이 검찰 수뇌부의 의지인데, 이것이 말단 기관인 속초지청에서는 사랑의 디너쇼로 구체화한 것이다.

이 광고에는 ‘관람은 입장권 소지자에 한함’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입장권이 알음알음으로 다 팔렸기 때문에, 행사 당일 켄싱턴호텔에서는 판매되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입장권을 팔기 위해 속초지청과 속초지청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여러 기관이 나서서 속초·양양·고성 지역 유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입장권 구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속초·양양·고성의 시장·군수와 경찰서장 등 공공 기관 장(長)은 전원 참석했다. 기관장 중에서 유일한 불참자는 속초지청장보다 서열이 앞서는 속초지원장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속초지청은 2백70여 명으로부터 참석 확약까지 받아, 켄싱턴호텔에 좌석 2백70개를 예약했다. 때문에 신문 광고를 보고 디너쇼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입장권을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새로운 관람객을 모을 것도 아닌데 다른 기관의 협찬을 받아가며 신문 광고를 낸 속초지청의 저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한 소식통은 “명예욕 때문이다. 속초지청이 좋은 일을 한다고 알리기 위해 남의 힘을 빌리는 허욕(虛慾)을 부렸다”라고 혹평했다.“민폐 끼치는 검찰이 민간인 단죄할 수 있나”

디너쇼 공동 주관 단체인 범죄예방위원회는 검찰 산하 민간 자원 봉사 단체로 80년 출범한 선도위원회가 96년 이름을 바꾼 것이다. 검찰은 지청별로 민간인 백여 명을 범죄예방위원에 임명하는데, 이들은 소년범 선도 및 교도소 재소자와 출소자 갱생 임무를 맡는다. 위원들은 대개 지역 연고가 탄탄한 사업가 출신이기 때문에, 지역 연고가 전혀 없는 지청장이 취임하면 지청장과 지역 주민들을 연결하는 일도 맡는다.

위원들 중에는 이런 기능을 악용해 검찰을 보호막 삼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는 절도죄나 선거법 위반자 등 전과를 가진 사업가가 선도위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검찰은 선도위를 범죄예방위로 바꾸면서 신원 조회를 철저히 해 위원들을 임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청장이 이들과 밀착한다면, 지청장은 이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

켄싱턴호텔을 소개한 것은 속초 범죄예방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20여 년 전 제법 유명한 가수였던 이 위원은 고급 카페를 운영했는데, 켄싱턴호텔 관계자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또 최진희씨 등 유명 연예인을 초청하는 일도 맡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최진희씨 등의 디너쇼 출연료는 3백만원이 넘어가지만, 이 위원과의 친분 때문에 교통비만 조금 받고 무료로 공연했다고 한다.

연예인들이 ‘공짜’로 출연해 준 덕분에 속초지청은 2백70여 명이라는 소수 관람객을 상대로 1인당 3만원이라는 아주 싼 가격을 받고도 디너쇼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소식통은 속초지청이 ‘민폐’를 끼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검찰이 사업자에게 신세를 지면 그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때로는 민간인을 상대로 수사해야 하는 것이 검찰인데, 자기가 주최하는 행사를 위해 신세를 지면 어떻게 민간인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디너쇼 참석자 중에는 속초지청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을 생각으로 디너쇼 행사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참석자는 “속초지청이 나섰으니 수천만원이 모이지, 자선 단체가 나섰다면 그렇게 많은 돈이 모였겠는가. 속초지청이 돈을 모으고 이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그로 인해 큰 돈이 불우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되는 순기능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지청장도 <시사저널>과의 짧은 만남에서 “연예인들이 무료로 출연해 줄 만큼 디너쇼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라고 자찬했다. 이런 자신감 때문에 속초지청은 디너쇼 행사를 춘천지검과 대검에 정식 보고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참석자가 속초지청이 상급 기관에 일을 잘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디너쇼를 개최했다고 평가했다. 한 공직자는 속초지청의 역할에 대해 의미 심장한 말을 던졌다.

“공공기관이란 제 할 일을 잘해야 한다. 검찰은 거악(巨惡) 척결과 토착 비리 근절을 잘해야 하고, 자치 단체의 여성복지과는 불우이웃돕기를 잘해야 한다. 검찰은 각 기관이 제 일을 제대로 하는지 사정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휘호를 내려 검찰 바로 세우기를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민폐를 끼쳐 가며 불우 이웃 돕기에 정력을 쏟는다면 검찰 고유 업무인 지역 비리 척결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속초지청의 디너쇼 사건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먼저 검찰 바로 세우기를 해야 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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