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묘소’ 훼손 사건 전말 추적
  • 충남 아산·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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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훼손 사건 전말 추적/깨어진 병풍석 보고 우연히 발견… 고유제 지낸 날 범인 검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묘소가 있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은 덕수(德水) 이씨 문중 산이다. 덕수 이씨 산소들은 충무공 묘소에서 2백m쯤 떨어진 산줄기에 특히 많은데, 이 묘소들 중간쯤에 충무공의 부친 이 정(李貞)공 내외의 쌍분(雙墳)이 있다. 그리고 서너 개 묘소 아래쯤에 충무공의 아우 이우신(李禹臣)공 내외 쌍분이 있다. 한식(4월6일)을 앞둔 지난 4월3일(토)과 4월4일 이틀간, 덕수 이씨들은 이 정·이우신 공 내외 쌍분에 병풍석을 치고, 떼를 입히는 작업을 했다.

그로부터 사흘째인 4월7일 저녁 8시쯤, 배낭을 멘 두 사람이 어라산 줄기를 따라 덕수 이씨 문중 묘소로 올라갔다. 그들은 묘소에 올라가 뗏장을 ㄷ자로 잘라 젖히고,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과 바위를 쫄 때 쓰는 정(쇠말뚝)을 때려 박았다. 이어 폐유(廢油)를 붓고 잔디를 덮은 다음, 다른 봉분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이러한 작업을 새벽 3시까지 반복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때아닌 봄 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더위 끝에 큰 비가 내렸다. 한 후손이, 이정공 부인 초계 변(卞)씨 묘소와 이우신공 묘소에 새로 친 병풍석이 한 군데씩 깨져 떨어지고, 그로 인해 봉분의 흙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큰 비 때문에 그랬나 보다’고 생각한 그가 이 사실을 문중에 알렸다.

4월20일과 21일 다시 떼를 입히기 위해 문중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초계 변씨 묘소의 흘러내린 흙 사이에서 식칼을 발견했으나, ‘굴삭기 기사가 떨어뜨렸나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봉분을 새로 쌓을 요량으로 굴삭기로 겉흙을 걷어내자 폐유 냄새와 함께 쇠말뚝이 발견되었다.

깜짝 놀란 문중 인사들이 이 정공의 산소 꼭대기를 조사하자, 그곳에도 식칼과 정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이 정공 묘소 상하에 있는 모든 산소의 정수리에도 식칼과 정이 박혀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은 아산경찰서(서장 모강인 총경) 수사대가 달려왔다. 다음날 경찰은 금속 탐지기로 충무공 산소 꼭대기에서 칼 두 자루와 정을 찾아냈다. 현충사 직원 증언이 결정적 단서 제공

현충사는 충무공 묘소에서 9㎞쯤 떨어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에 있다. 현재 현충사 일대는 덕수 이씨 문중 산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덕수 이씨 산소와 기계 유(兪)씨 산소 등 묘소가 총 23기 있다. 관리사무소 송대성 서무계장이 조사한 결과 23개 묘소 전부에 식칼과 정이 박혀 있었다. 식칼과 정은 현충사 뒷산인 방화산 정상과 현충사 담장 밖에 있는 산소에서도 발견되었다.

김유현 경위가 이끄는 수사팀은 문중 내부 갈등, 다른 성씨와의 갈등, 무속인의 행위, 민족 정기를 훼손하려는 자의 짓 등 여러 가능성을 놓고 수사했다. 문중 내부 갈등이라면 덕수 이씨 중 특정 파의 묘소만 훼손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산소를 훼손했으므로 문중 갈등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기계 유씨 산소를 훼손한 것으로 보아서는 다른 성씨와의 갈등도 아닌 것 같았다.

이때 충무공 묘소를 관리하는 현충사 음봉분소장 이재왕씨(55·충무공 15세 손)가 매년 4월·11월·12월 청주와 남해·강원도에 산다는 무당들이 충무공 묘소에 신도와 함께 찾아와 치성을 드리고 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당들은 통돼지를 비롯한 음식과 광목 등을 가져와 충무공 묘소에서 제를 올린 다음 음봉분소에 음복을 내놓고 돌아가는데, 올해에는 남해에 산다는 무당이 오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 낸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착오가 일어났다. 오지 않은 무당은 남해 무당인데, 이분소장은 “그 무당은 남해인가 통영에 산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통영인 것 같다”라고 잘못 말했다. 그런데 경찰은 통영은 아예 빠뜨리고, 남해를 김해로 알아들었다. 이로 인해 김해에 수사대를 보낼 준비를 서둘렀는데, 이 실수가 뜻밖에도 범인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남해 거주 무당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모강인 아산경찰서장은 4월21일부터 정진원 경사 팀으로 하여금 식칼을 만든 곳이 어디인지 탐문하도록 했다. 정경사 팀이 아산 지역 무속인을 만나 칼을 보여주자, “이 지방 무당이 쓰는 칼 같지 않다. 칼은 공주·당진·수원·안성 등지에 있는 철공소에서 주로 만드니, 그곳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안성의 한 철공소에 찾아가자 “전남 남원에 사는 박 아무개가 40년간 칼을 만들어 왔는데, 그에게 보여주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답변이 있었다.

그 날 박씨를 찾아가자 박씨는, “생선 자를 때 쓰는 칼이다. 경기·충청 지방에서 만드는 칼보다 얇게 만든 것으로 보아 남쪽에서 만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전에 사는 전 아무개씨도 칼 전문가라는 소문이 있어 찾아가니, “부산 쪽 칼이다. 자갈치 시장에 가면 이런 칼이 많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슷한 시각 서울 청량리를 뒤지던 김기연 형사 팀이 한 칼가게에서 똑같은 칼을 찾아냈다. 가게 주인은 “2년 전 부산에서 온 중간 상인으로부터 개당 3천원에 30자루 샀는데, 다 팔고 한 개 남았다”라고 설명했다.

보고를 종합한 모서장은 4월22일 오후 수사팀을 부산과 김해로 파견했다. 그런데 부산으로 간 수사팀으로부터 ‘자갈치 시장에서 똑같은 칼이 사용되는데, 무지개 칼이라고 부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 즉시 김해 파견팀까지 합류해 6명으로 불어난 수사대가 부산 사상·구포 일대 철공소에 대한 탐문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폐점 시간이 지난 다음이어서 철공소 사장집 주소를 알아내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ㄱ철공소 사장 김 아무개씨였다. 칼을 본 김씨는 “어떤 아줌마가 칼 소매점을 한다면서 무지개 칼만 한번에 15개씩 사가는데, 이미 사간 것만도 5백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칼장사를 한다면 여러 종류의 칼을 사가야 하는데 매번 무지개 칼만 사가는 것이 이상해서 “아줌마가 올 때마다 이 칼이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준비되었다고 연락하면 오세요”라고 말하며, 연락처를 달라고 했었다. 아줌마는 별 의심 없이 ‘양순자(48)’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며칠 후 김씨가 전화를 걸자 누군가가 받았다. 김씨가 ‘양순자씨 댁이냐’고 묻자, 상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씨는 전화 받는 품으로 보아서는 수상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대충 둘러댄 뒤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며, 양순자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이 전화번호는 부산시 북구 덕천동에서 양순자씨가 운영하는 ‘백철학관’ 것이었다. 그날 밤 수사대는 백철학관 앞에서 잠복 근무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4월23일 덕수 이씨 문중은 조상 묘소가 훼손된 것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조상께 용서를 비는 고유제(告諭祭)를 올렸다. 고유제를 끝내며 반드시 범인을 잡으라고 촉구문을 낭독했다. 이러한 의식이 끝난 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4시20분쯤 백철학관 앞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이 철학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주머니를 붙잡았다. “양순자씨지요?”라고 묻자, “그렇다”라고 하면서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덕수 이씨 문중 사람들이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음복할 때였다. 그들은 “희한하다. 고유제를 올리자마자 범인을 잡았다”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초계 변씨 할머니와 이우신 할아버지 묘소에 친 멀쩡한 병풍석이 이유 없이 깨진 것도, 칼이 박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조상님의 배려 아니겠느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수사대는 양순자씨가 여성이어서 대충 몸수색을 하고 같이 가자고 요구했다. 양씨는 “칼은 ㄱ철공소, 정은 ㄷ공업사, 폐유는 ㅇ선착장에서 샀다”라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해, 형사들이 문 밖을 지키는 상태에서 백철학관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왔다. 양씨를 데리고 ㄱ철공소와 ㄷ공업사로 가자, 두 업소 사장은 ‘칼과 정을 사간 여자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ㅇ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또 양씨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 건물 화장실에 양씨를 들여보내고 밖을 지키는데 ‘또그르르…’ 병 구르는 소리가 났다. 급히 화장실 문을 열자 양씨가 쓰러져 있고, 원비D 병이 구르고 있었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범인을 잡은 아산서로서는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순간이었다. 그 즉시 병원으로 옮겨 위를 세척했다. 의사는 “제초제 그라신을 마셨는데, 그라신으로는 이렇게 위험한 상태까지 가지 않는다. 환자가 다른 지병을 갖고 있는 것 같으니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말해, 부산대 병원으로 옮겼다.

이때쯤 다른 수사팀이 ‘양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무학으로, 남편 문쭚쭚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그러나 83년부터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따로 살다 철학관을 운영했다. 남편 문씨는 새 여자를 만나 자녀와 함께 생활했으나, 큰아들 문대원씨(27)는 양순자에게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두 딸이 양순자씨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등 가족내 불화가 많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아들 문대원씨 신병 확보가 중요했다. 수사팀은 문씨의 호출기에 아버지 집 전화번호를 쳐놓고 잠복한 끝에 그를 검거했다.

문씨를 신문하자, 그는 “퇴계·율곡·육영수·충장공 김덕용, 이성계의 5대 조부(삼척 활기묘), 대원군 부친 남연균, 숙종, 안동 김씨 시조, 전주 이씨 시조 묘와 손석우씨가 최고 명당으로 꼽은 서산 자미원 터 등에 어머니와 함께 식칼과 정을 박았다”라고 털어놓았다. 이러한 진술을 전파하자 안동경찰서가 퇴계 선생 묘소에서 식칼과 정을 찾아냈다. 독자적으로 조사에 착수한 문화재관리국은 태조와 세종·효종 산소에서 똑같은 칼과 정을 발견하고 이를 아산서에 통보했다.

이어 수사대는 3월 한달간 백철학관에서 건 전화 통화 내역을 조사하다가 아산(24회)·영주(10회)·부산(7회)·천안(3회)·합천(2회)·서울(1회)·밀양(1회)·안동(1회) 기상대에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냈다. 범행하기 전 모자는 지역 기상대에 전화로 날씨를 확인했던 것이다. 적용할 죄목 적고 형량 약해

4월29일 의식을 회복한 양씨는 아산시 광혜병원으로 압송되었다. 이 날 모서장은 ‘95년 7월 김수로왕과 부인 허황후 능에 폐유를 칠한 식칼과 정이 박혀 있었는데, 양순자의 짓이 아닌지 알아 봐 달라’는 내용으로 김해 김씨 문중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모서장이 사실을 확인케 하자 양씨는 김수로왕릉은 혼자서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아산서는 외부의 사주에 의한 범죄 가능성을 찾기 위해 양씨 모자의 계좌를 조사했으나, 의심 갈 만한 출납 내역을 발견하지 못했다. 검거 당시만 해도 양순자씨는 꿈에 충무공이 나타나 머리가 아파서 덕수 이씨 산소를 훼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음독을 시도했다 깨어난 후에는 조금 다른 진술을 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95년 아버지와 따로 살던 3남매가 의견 충돌을 일으켜 아들(문대원)이 떨어져 나와 96년부터 자신과 같이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명한 산의 정기와 위인들의 묘소가 있는 명당 정기를 받아야 가정이 화목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왜정 때 일본인이 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사실이었다. 성인(聖人) 무덤에 쇠말뚝을 박으면 성인의 정기가 그 집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어진다고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다.’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녕을 위해 성인 묘소와 명당 혈처에 ‘칼침’을 꽂은 양씨 모자에 대해 검찰이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은 그리 많지 않다. 롯데 신격호 회장 부친 유해 훼손 사건처럼 분묘와 시체를 훼손했다면 형법 159∼161조에 따라 징역 10년 형이 가능하다. 그러나 양씨 모자는 분묘를 발굴하지도 유해를 훼손하지도 않았으므로 유골 오욕죄 등으로 기소하기 어렵다. 충무공이나 퇴계·율곡·김수로왕릉 등은 국가 지정 사적지이다. 따라서 문화재관리법 위반죄 적용이 가능한데, 최고 형량이 징역 3년을 넘지 못한다. 법 만드는 사람들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희대의 범죄를 저지른 양씨 모자 사건을 한국 사회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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