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벗어나 VIP 병실에 간 권노갑,박지원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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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5만원짜리 VIP 병실 입원…구속집행정지 노린 포석
서울 중구 삼성제일병원 355호실은 VIP 병실이다. 병실에 들어서면 대형 텔레비전이 눈에 띄고, 의료용 특수침대와 보호자용 침대를 겸하는 소파, 전자 할로겐 레인지, 오디오가 갖추어져 있다. 거실과 접견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 변기에 비데까지 달려 있는 1급 호텔급이다(위 사진 참조). 이 VIP 병실은 삼성제일병원에 딱 하나밖에 없다. VIP 병실은 자주 이용되지 않아 거의 비어 있다. 지난 1월29일 VIP 병실에 새 환자가 입원했다. 징역 5년 추징금 2백억원을 선고받은 권노갑씨이다.

1월29일 오전 10시30분 서울지방법원 311호. 50석인 방청석을 동교동계가 꽉 채웠다. 권씨는 무죄 판결을 자신한 듯 입정했다. 그는 구속된 이래 한 번도 수염을 깎지 않아 흰 수염이 더부룩했다. “흰 수염은 무죄의 상징이다. 오늘은 고문님이 면도하는 날이다.” 권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형사3단독 황한식 판사가 판결에 앞서 주민등록 번호를 물었다. 이번에도 권씨는 ‘103****’라는 주민등록 번호 뒷자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황한식 판사는 20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징역 5년에 처하고, 2백억원을 추징한다.” 이례적으로 재판부는 검찰 구형 그대로, ‘에누리’ 없이 선고했다. 권씨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목이 메었다. “이건 아니여. 진실이 아니여. 하늘이 알거여.” 권씨는 말을 맺지 못하고 퇴정하다가 한 차례 기우뚱했다. 올해 일흔네 살. 항소심에서 감형되지 않으면 그는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되어야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권씨는 더 일찍 십오척 담장을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수감 전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권씨는 지금까지 두 차례 수감되었다. 그러다 두 번 다 형기를 마치지 않고 교도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 1997년 한보특혜비리 사건으로 권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DJ가 대통령에 당선하자, 1998년 1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검찰은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을 수 있는 괴사병이 우려된다며 석방했다. 2002년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어 권씨는 두 번째 구속되었다.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그는 구속 3개월 만에 또다시 당뇨병 등 지병으로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그때도 삼성제일병원에 입원해 종합 검진을 받았고, 그 결과를 법원에 제시해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7월 항소심 판결까지 그는 구속집행정지가 연장되어 자유의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항소심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고 DJ를 찾아가 큰절을 올렸다.

권씨는 선고를 받은 지난 1월29일 서울구치소로 갔다가 그 날 밤 삼성제일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입원한 다음날 기자가 찾은 병실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다. 병실 밖에는 권씨의 그림자 문성민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자가 찾았을 때 권씨의 안경을 만들 안경사들이 출장을 나와 있었다. 안경사 2명이 시력 테스트용 큰 시력표를 통째로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권씨의 증상은 지난 두 차례 수감 때와 똑같다. 당뇨병·고혈압·뇌빈혈에 시달리고 치질도 심하다고 한다. 이번 입원 역시 구속집행정지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받아들여진다. 민경식 변호사도 “검진 결과를 보고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내겠다”라고 말했다. 지난 8년 동안 권씨 주치의를 맡고 있는 삼성제일병원 한인권 박사는 “발가락 10개 모두 염증이 생겼다. 특히 엄지발가락이 심하다.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괴사 직전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수형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는 견해를 조심스레 비쳤다.
우연의 일치인지 DJ 정권의 또 다른 실세 박지원씨도 현재 세브란스병원 VIP 병실에 입원해 있다.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박씨는 1월27일 녹내장 수술을 받았다. 30년 전 왼쪽 눈을 잃은 그는 오른쪽 눈에 녹내장이 발병했다. 서울교도소 관계자는 “의사 소견을 듣고 재수감 시기를 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실명 위기여서 구속집행정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속집행정지는 판사가 결정한다.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더라도 추징액은 그대로 남는다. 1심 재판부가 선고한 추징액은, 권노갑씨 2백억원, 박지원씨 1백47억원이다. 수백억원대 채무자로 몰락한 두 사람은 병원비 씀씀이도 크다. 권노갑씨가 입원한 VIP 병실은 하루 입원비가 55만원이고, 박지원씨 병실은 하루 54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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