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새 풍속 “취업은 NO, 창업은 YES”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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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 벤처 기업 세워 ‘구직난’ 돌파 모색…실무 능력 키우기 몰두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대졸 예정자를 상대로 취업 설명회에 열을 올리던 지난 9월9일 오후, 고려대 경영관에서는 또 하나의 이색적인 설명회가 열렸다. 경영대 동아리인 ‘미래기업가모임’이 주관한 신입 회원 모집 설명회.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이 예비 기업가들의 옷매무새만큼은 007가방을 들고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유명 경영 컨설턴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짙은 분홍색이나 쪽빛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까지 색깔을 맞춘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연단에 올라 세련되게 설명회를 이끌어 가는 이 모임의 회원들은 대부분 상경 계열 3~4학년 학생들.

졸업 후 경영 컨설팅에 진출하기를 희망하거나 최고 경영자를 꿈꾸는 학생들의 모임인 미래기업가모임은 실전 위주로 경영 분석 활동을 벌인다. 프랜차이즈 시스템 개선 방안이나 기업 합병·매수(M&A), 광속 상거래(CALS) 등 선진 외국으로부터 우리 기업에 적용되기 시작한 최신 경영 기법을 망라해 연구·분석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활동 방식은 철저하게 사례 연구 중심이다. ‘전세계 생활 용품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P&G 그룹의 성공 요인은?’ ‘새로운 생산품과 기존 고객의 취향이 충돌할 때 마케팅 담당자로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같은 ‘따끈따끈한’ 주제만이 이들의 호기심을 잡아 끈다.

전국 대학에 창업 동아리 90개 넘어

설명회를 진행하는 방식도 프로 냄새를 풍긴다. 늘 구매자나 최고 경영진을 대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이들 예비 경영인에게는 설명회라는 방식 자체가 실전 체험 필수 항목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네 모임과 관련한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고, 멀티 미디어와 프로젝터를 이용해 청중의 관심을 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취업 전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새벽같이 도서관을 찾아 영어 공부와 면접 준비에 열을 올리는 대학생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취업 전쟁의 현장이다. 최근 몇년 동안 대졸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졸업을 앞두고 상식과 면접 요령을 익히는 ‘반짝 과외’ 수준을 뛰어넘어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에 맞는 독자 영역에서 미리 진로를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벤처 기업 창업 동아리는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 전국 각 대학에는 무려 90개가 넘는 벤처 기업 창업과 관련한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 물론 동아리의 주축을 이루는 이들은 재학생이다. 지난 5월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 대학생 벤처 창업 연구회’ 이사진 가운데 3분의 1이 학부생이다. 그렇다고 창업 동아리의 기술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동아리에는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이 참가하고 있어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도 뒷받침되고 있다.
공학도들이 창업으로 몰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개척 정신의 상징처럼 언론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선배 세대들의 성공담이 그들의 의욕을 자극한 것이다. 초음파 진단기로 세계 시장을 석권한 메디슨의 이민화 사장은 현재 한국벤처기업협회 회장으로서 벤처 창업의 전도사처럼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 과정에 다니면서 일찌감치 창업해 성공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후배에게도 창업을 권유해 회사를 차리게 했다. 컴퓨터 컨트롤러 시스템 개발 업체 터보테크의 장흥순 사장이 그의 영향을 받아 창업에 성공한 후배이다. 이밖에도 위성 방송 수신기로 세계 시장 진출에 성공한 건인의 변대규 사장이나 인터넷 전문업체 웹 인터내셔널의 윤석민 사장 등 이 바닥에서 내로라 하는 30대 사장들은 모두 ‘조기 창업파’이다.

게다가 공학 계열 교수들도 창업 동아리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중소기업청 역시 있는 힘껏 육성책을 펴고 있다. 중소기업청은 현재까지 창업 동아리 27개를 선별해 재정 지원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지원 범위를 점차 늘릴 계획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대학가의 벤처 열풍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벤처 창업 동아리 회원은 전기·전자 또는 기계 공학이나 경영학 전공자가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분야 전공이 아닌 학생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전공이 다른 학생들이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업종 창업에 도전하기도 한다.

연세대 공대에 있는 ‘연세벤처창업연구회’에는 기계·전자나 정보·통신 이외에 이색적인 분과가 2개 있다. 경영·법률 분과와 문화·방송 분과가 그것이다. 주로 첨단 과학 기술 쪽에 집중되는 기존 벤처 산업과 달리 이들이 노리는 분야는 다양하다. 독립적인 음반 기획을 준비할 수도 있고, 사이버 공간에서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동호인끼리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사이버 공간에 작곡 사무실을 낼 수도 있다. 실제로 연세벤처창업연구회에서 활동하는 학생들 중에는 교내에서 그룹을 만들어 음악 활동을 한 학생도 있다. 문화·방송 분과위원장인 이종영군은 경제학과 4학년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벤처라고 하면 기계·전자 등 기술과 직접 관련한 것만 생각하지만 요즈음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가 관심을 갖는 분야에서 창업을 준비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말한다.

취업난뿐만이 아니라 기업의 채용 방식 변화도 학생들이 일찍부터 예비 직업인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요인이다. 2~3년 전부터 일부 대기업이 정기 공개 채용 비중을 낮추고 인턴 사원제나 상시 채용제를 채택해 왔다. 공개 채용 인원 중에서도 상당수 응시자는 이미 논문 현상 공모나 공모전 등 각종 경로를 통해 ‘입도선매’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필기 시험 성적보다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기업측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다. 취업 전문 회사인 (주)리크루트 유제흥 과장은 작년의 경우 순수한 의미에서 공채가 전체 채용 인원의 70% 정도였다면 올해는 이미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자본 적게 드는 ‘정보 제공업’ 인기

자연히 미리미리 취업을 대비하자는 ‘준비론자’들의 전략도 이론보다는 실전에 치우친다. 고려대 미래기업가모임은 이미 국내 유수한 컨설팅 업체와 제휴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하버드나 스탠퍼드 대학에 있는 유사한 경영 관련 모임들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정보 교류에 착수했다. 김익수 교수(고려대·무역학)는 “미국 등에서 일반화한 이런 모임이 국내에 선보인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이론과 접목되어 있는 동아리들이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 대학 현실에서 외부 컨설팅 업체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의 동아리가 재학생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획기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장기적으로 대학 안에 사회 진출과 관련한 전공별 소모임은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소모임들이 자기 일을 가져 보겠다는 창업 관련 동아리와 접맥되어 나가는 통합 현상도 두드러질 것이다. 최근 일부 대학생이 컴퓨터 통신의 IP(Information Provider) 사업과 같은 정보 제공업이나 인터넷의 상거래 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4월 서강대에서 ‘블랙박스’라는 벤처 창업 동아리가 생겨난 것은 사실 이렇게 IP 사업 컨설팅을 해 오던 회원들이 합류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재 40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블랙박스는 경영 또는 교육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온라인에 제공하는 서비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IP 사업은 초기 자본을 별로 들이지 않으면서 아이디어만 좋으면 짧은 기간에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아르바이트 삼아 이 사업에 뛰어드는 대학생 수도 적지 않다.

준비를 소홀히 한 창업이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외국어대와 서울시립대 재학생들이 모여 만든 디자인 회사 ‘아카디자인 진’의 월 매출액은 2천만원 가량. 10평도 안되는 임대 사무실에서 초기 자본금 2천만원으로 출발한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확이지만, 이 회사 직원들은 이대로 가면 사업 전망이 비관적이라고 전망한다. 외국어대 일문과 학생인 이 회사 이우진 사장은 “직원들을 포함해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로 유학을 권한다. 일단 취약한 자본력으로 출발한 이상 ‘반짝 경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정보통신과 결합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창업은 즐거운 만큼이나 위험하다. 벤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험한 길에 도전하는 패기 만만한 대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만큼 대졸 취업난을 뚫는 과거의 모범 답안은 이미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영어와 상식만 잘하면 ‘일단은 합격’이라는 취업 준비생들의 ‘신앙’이 무대 뒤로 퇴장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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