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국제 범죄와 공개 전쟁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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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러시아 마피아 등 국내 침투 갈수록 심각…“국가 차원 전담기구 필요”
좀처럼 외부에 얼굴 알리기를 꺼리는 안기부 내에서도 공개적으로 국민의 협조를 구하는 곳이 있다. 지난해 2월 발족한 국제범죄정보센터라는 부서이다. 이 부서는 마약 밀조·밀거래, 테러, 밀수, 통화 위조, 총기 밀거래, 조직 폭력 등 국경을 뛰어넘어 자행되는 범죄를 담당한다.

냉전 체제 붕괴와 개방 확대라는 국내외 정세 변화의 틈새를 비집고 날로 기승을 부리는 이들 범죄는 국가적인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정부가 신설한 것이 바로 안기부의 국제범죄정보센터이다. 이 조직은 미래의 안기부 상을 보여주는 모델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 조직이 7월12일 공개 행사를 가졌다. `‘세계화와 국제범죄 대응책’이라는 주제로 연 세미나가 그것이다. 이 자리에는 안기부는 물론 검찰·경찰·관세청 등 국제 범죄 수사 실무진과 관련이 있는 국제법 학자 다수가 참석해 국내에 파고든 국제 범죄의 심각성을 토론했다.

발제자로 나선 서울지검 강력부 신현수 검사는 “한국은 90년대 초반 마약과의 전쟁으로 마약 단속에 성공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93년부터 마약 중독자가 다시 급격히 늘었고, 이제 더 이상 수사 단속만으로는 해결될 상황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마약 상황이 어려워진 이유로 그 동안 해외 관광 붐이 이어지면서 마약 경험자가 늘어난 데다, 이 과정을 통해 일반인의 마약관도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관세청 박영선 담당관은 김포공항을 통한 마약 밀수가 날로 지능화·다양화해 가는 실태를 밝혔다. “여행자들은 신변 휴대품은 물론 가방 이중창, 비타민병 속, 항문, 애완 동물의 뱃속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마약을 들여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마약이 공해상에서 한국 선박에 인도돼 세관이 없는 도서 ·항만으로 밀반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마약을 비롯한 총기·위조 지폐·검은돈 등 국제 범죄는 거의가 배후에 조직이 있다. 안기부가 추적해 파악한 국제 범죄 조직의 국내 침투 실상은 자못 심각하다.

한국 침투에 가장 앞장선 해외 범죄 조직은 일본 야쿠자이다. 주로 야쿠자에 가담한 현지 교포가 국내 연고를 이용해 침투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전체 야쿠자 조직원 9만여 명 중 교포는 약 10%인 9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국내 조직폭력계와 연계해 부동산 투기, 호텔 인수, 도박장 진출 등 합법 투자를 가장해 침투하고 있다. 부산 K호텔, 울산 S백화점, 서울 H빌딩 등 6건 3백억원 상당의 부동산이 이미 야쿠자 수중에 들어가 있다.

또 해마다 야쿠자 조직원 만여 명 중 절반인 5천여 명이 해외여행을 가장해 사격 연습·매춘·도박 등을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서울의 L·A 호텔을 애용하며, 국내 조직폭력계의 안내로 사격장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한 뒤 돌아간다는 것이다.

야쿠자 다음으로 한국 진출에 열을 올리는 해외 범죄 조직은 러시아 마피아다. 러시아에는 옛 소련 체제가 무너진 후 KGB·군 출신 등 옛 공산당 간부 다수가 마피아 조직에 들어가 간부로 활동하는데, 현재 6천여 조직에 10만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중 특히 한국과 가까운 연해주 사할린 지역의 마피아가 적극적으로 국내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외형상으로 `‘시장 개척자’ 행세를 하며 들어온다고 한다.
국내 폭력조직과 연계, 마약·총기류 밀반입

러시아 마피아는 주로 부산을 무대로 하여 일부 영세 무역업자와 지역 조직폭력계에 접근해 러시아 관련 채권 해결 및 마약·보석류·무기류 밀매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특히 총기류 반입 기도가 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러시아 마피아가 국내에 팔았다가 적발된 총기는 권총 10정에 실탄 5백20여 발이었다. 러시아 마피아의 한국내 총기 반입 기도는 갈수록 대담해져, 지난 7월13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기관단총 40여 정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던 마피아 선박이 러시아 세관에 적발되기도 했다.

중국·대만·홍콩을 무대로 활동하는 트라이어드(삼합회)도 한국 진출 기도를 노골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50여 조직에 10만여 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계 폭력 조직 트라이어드가 한국 진출을 노리는 분야는 마약과 불법적인 인력 공급(밀입국)이다. 지난 한 해 대만과 홍콩에서 한국에 들여오다 적발된 마약은 헤로인 4.5㎏에 히로뽕 1.5㎏였다. 체포된 마약 운반책의 배후를 조사한 결과 홍콩·대만의 트라이어드 조직이 개입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헤로인의 홍콩 현지 가격이 1㎏에 약 4천만원인데 한국에서는 그 백배가 넘는 50억원에 달한다는 점을 노렸던 것이다.

트라이어드는 이미 국내 폭력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 한국과 홍콩 당국이 정보를 교환한 결과 국내 3대 폭력 조직 중 하나인 서방파 조직원 김아무개씨가 현재 홍콩 트라이어드의 자금을 받아 홍콩에서 호스트바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한국인 여성 관광객을 상대로 퇴폐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계 트라이어드는 지난해부터 인력 매매에도 적극 개입했다. 주로 중국에서 브로커 노릇을 하는 트라이어드 조직원들은 1인당 한화 3백만원씩 받고 한국 밀입국을 중개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수사기관에 적발된 밀입국자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80명에 이른다.

그밖에 미국의 범죄 단체인 마피아도 국내 조직폭력계와 연계해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배중 도피한 양은이파 부두목 한승희씨가 미국에서 마피아의 도움으로 거점을 잡고 활동하다, 지난해 살인·마약·환치기 혐의로 미국 수사 당국에 체포돼 현재 미국내 중범죄자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수사 관계자들은 이처럼 세계 각국의 대규모 범죄 조직이 한국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로 `‘서식 환경’을 꼽는다. 그동안 경제성장에 따른 향락 산업 번창과 출입국 절차 간소화 등 행정 규제 완화 조처로 한국이 국제 범죄 조직의 입맛에 맞는 서식처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제 범죄 조직의 한국 침투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국내 수사당국의 체계에는 큰 허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제 범죄를 담당하는 곳은 검찰·경찰·관세청·안기부이다. 이 중 안기부에는 정보 수집 역할만 주어져 있고 나머지 세 곳은 수사권까지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안기부의 국제범죄정보센터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마약 단속이 주업무라는 점이다. 그나마 각 수사·정보 기관 별로 정보와 경험의 교류가 전혀 안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부처간 이기주의로 인해 범증 확보 단계에서 범죄조직에 정보가 누출되는 일마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범죄를 담당하는 일선 실무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국가 차원의 국제 범죄 전담 기구 설치이다. 효율적 지휘 체계를 세워 달라는 것이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한국의 국제 범죄 대처 능력이 `‘삼풍백화점 붕괴 후 보인 우왕좌왕식 대응 수준’이라고 실토했다.

이 분야 일선 실무자들은 이와 관련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 하나를 가슴에 묻고 지낸다. 93년 김포세관에서 국제 범죄를 전담하던 김아무개씨(6급)가 공항을 통해 침투한 마약사범을 적발했다. 범증을 뒤늦게 확보한 김씨는 범인이 숨어 지내던 서울 시내 은신처를 찾아내 마약을 압수한 뒤 구속시켰다. 그러나 검찰은 즉각 관세청장 앞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고 김씨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요구했다. 검찰의 수사 관할인 서울 시내에 `‘침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검찰의 위세 앞에 김씨는 마약 사범을 검거하고도 좌천돼 대전세관으로 쫓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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