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진단서’ 논문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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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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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춘 교수의 논문 <지역감정의 사회심리학> 요지/지역감정의 원인·해소책 모색
(‘머리말’ 생략)호남인은 왜 영남인을 싫어하는가? 호남인들은 공통적으로 차별과 피해를 받았다는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있고, 그 가해자로 영남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남인의 피해 의식은 해방 이후 우리 역사에 전개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는 호남 지역이 1960년대 이래 추진된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5·16 이후 권력과 부을 차지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한 정부와 재계의 엘리트가 대부분 영남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호남인의 영남인에 대한 피해의식 혹은 적대감의 근거로 설정되는 위의 두 가지 문제는 조금만 더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인 개발과정에서 나타난 소외의 문제는 충청이나 강원 지역에도 해당되는데 왜 유독 호남인들만이 박탈감을 심하게 느끼게 되는지를 설명해 줄 수 없다. 두 번째 문제인 지배 엘리트의 충원 문제 또한 인구비를 고려하더라도 영남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과대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유독 호남에 대한 차별이라고 볼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 갈등 문제의 핵심은 왜 ‘영남에 대한 특권’이 발생하였는가의 문제로 설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많은 경우 ‘호남에 대한 차별’을 부각시키는 논리의 비약 아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고 보여진다.

‘영남에 대한 특권’이 발생하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하나(예를 들면 산업입지조건), 여기에서의 논의와 관련해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측면은 한국전쟁이 남한사회의 구조화에 미친 영향이다. 한국전쟁에 관해 1989년 필자가 수행한 조사 연구는 전쟁 당시 북의 침략에 맞서 장교나 사병으로 국군쪽에 참전한 비율이 지역적으로 달리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전국 평균(35%)보다 영남 지역(41%)이 높고 호남 지역(27%)이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난 후 남한의 정권이 전쟁에 참여한 집단을 선택적으로 보상하는 과정에서 영남 출신이 상대적으로 유리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참전 세력이 중심이 된 남한의 지배구조가 전쟁 이후 3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으므로 영남의 특권적 위치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참전율의 지역적 차이로 인해 전쟁 후에 구축된 남한의 지배 질서가 ‘영남의 특권’을 담보해 주는 형태로 구조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영남의 특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의 정도가 호남인의 경우에서만 높게 나타나고 나아가 적대감으로까지 전환되고 있는가? 이 문제의 설명에 빠질 수 없는 사건이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사태로부터 출발점을 찾을 수 있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기존의 지배질서, 즉 영남 중심의 참전 세력에 의한 정권의 지속을 거부한 저항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은 결국 국민적 동의를 얻어 일정한 결실을 맺었지만, 그 과정에서 호남인이 겪은 피해는 ‘광주’로 상징되어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있다. 물론 광주사태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호남인이었고, 그 사회적 결과는 ‘영남의 특권’을 보장하는 지배질서의 정당성에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흠집을 가져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호남인들은 그들의 상대적 소외의식을 바로 영남 사람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광주사태 같은 특수한 경험을 겪지 않은 충청이나 강원 지역 출신은 영남인에 대한 적대감이 호남인만큼 강하지 않은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비호남인들의 호남인에 대한 지역감정’과 ‘지역감정이 호남인에게 미친 영향’ 생략)호남인의 영남인에 대한 편견은 결코 영남인의 인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가해자로서 영남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현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남인에 대한 전국민의 편견은 호남인의 인성을 문제삼는 심리적인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해소가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해소책도 이 두가지 차원의 문제를 각기 분리하여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호남인의 영남인에 대한 적대감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영남인의 특권적 위치와 ‘광주’로 대표되는 호남인의 구체적인 피해가 결합되어 비롯된 것이므로 이 문제의 해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그 하나는 영남인의 기득권이 자동적으로 재생산되지 않도록 사회구조를 열린 것으로 하여야 한다. 이 제안은 물론 우격다짐으로 영남인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지금부터라도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기회의 평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확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만 특정 지역 출신의 사회 지배층 독점 현상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호남의 피해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신속하고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광주문제에 대한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매우 시급하다. 또한 광주 문제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호남의 경제적 낙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과감한 투자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행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적 탈냉전의 구도 아래 북방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으므로 중국대륙과의 연계에 거점이 될 수 있도록 서해안을 집중적으로 개발한다면 지금까지 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호남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호남 출신 정치지도자의 정권 수용이라는 미묘한 문제가 남아있는데, 이는 호남인에게는 당연한 열망인지도 모르지만 타지역인들에게는 호남인에 대한 거부감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왜냐하면 호남인의 피해의식은 해소될지 모르지만 타지역인의 호남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남인의 피해의식을 해소하고 구체적인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은 시급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나, 이는 항상 다른 지역과의 관련속에서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지역 감정의 중요한 한 축은 전국 사람들의 호남인에 대한 편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국 사람들의 호남인에 대한 지역 감정의 문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심리적인 뿌리를 가진 편견이라는 이유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편견 해소를 위해서는 아예 편견이 발생하는 범주의 구별을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즉 사투리 사용을 금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전라·경상 등의 구분을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편견의 대상이 되는 범주를 없애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현실적인 해소책일 것이다. 다만 편견이 해소될 수 있도록 교통수단 및 통신시설을 확충하여 빈번한 접촉을 유도함과 동시에 가정을 포함한 사회와 학교에서의 적극적인 교육을 통하여 편견의 벽을 허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차선의 대안이다. 물론 편견이 정말 편견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학문적·사회적 활동과 이를 전달하는 언론매체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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