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하는 조선족 밀입국자
  • 남해·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1995.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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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경비 허술해 급증… 브로커 활개, 대련에 4천명 ‘대기중’
남해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되고 있다. 밀입국하려는 중국 교포들과 이들을 막으려는 국내 수사기관들이 술래잡기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쪽 브로커와 손잡은 국내 알선 조직에 의해 해상 경비에 ‘구멍’이 뚫리는 사례가 잇달아 발생했다.

그중 지난 8월1일 남해경찰서와 통영해양경찰서가 검거한 중국 교포 64명의 밀입국 사건은,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들이 해군과 해경의 비상 경계망을 뚫고 상륙해 갈빗집에서 단체로 식사까지 한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주민 정아무개씨(39·택시 기사)로부터 “율도리 고순마을 뒷산에 수상한 사람 수십 명이 숨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남해경찰서 창선지서와 통영해경은, 1일 오후 1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에 걸쳐 중국 교포 64명(남자 42, 여자 22)을 검거했다. 오후에는 알선 총책 양용석씨(28·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와 행동책 윤옥균씨(49·선원·경남 남해군 창선면 상죽리)가 통영해경에 검거돼 사건 전모가 드러났다. 양씨는 지난 6월10일 중국으로 건너가 현지 모집책으로부터 13만2천달러를 받고 유자망 어선인 경선호 선장 김평호씨(37)를 포섭해 밀입국을 알선한 것으로 밝혀졌다.

알고도 놓친 비상 경계망

대부분 흑룡강성 출신인 밀입국 교포들은 7월21일 중국 선적인 철선을 타고 대련 항을 출발했다. 당초에는 7월23일 공해상에서 경선호와 접선할 계획이었으나, 태풍 페이 때문에 귀항했다가 7월26일 다시 출항해 다음날 경선호에 옮겨 탔다. 이들이 남해섬의 창선면 서대리 선착장에 도착한 때는 8월1일 새벽 4시께이다. 국내 알선책인 양씨와 선원들의 안내를 받은 일행은 오전 8시쯤 선책장에서 2.5㎞ 떨어진 고순 마을의 오성 숯불갈비(주인 신순진)에 도착해 식사를 한 후 인근 산속에 숨어 있다 검거됐다.

밀입국 사건은 알선자나 승선자 서로가 신분 노출을 꺼리는 데다 철저한 ‘맞돈 거래’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밀입국자를 검거해도 선원 등 말단 행동책 외에는 알선 조직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규모 밀입국단과 알선 총책을 함께 검거하는 개가를 올린 통영해경은, 해당 경찰관에 대한 포상을 상신하는 등 들떠 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사건 전개 과정에서 수사기관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도 검거 실적을 의식해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오히려 문제로 지적됐다.
알선 조직의 수상한 낌새를 가장 먼저 읽은 곳은 인근 사천경찰서였다. 사천경찰서는 7월20일께 ‘중국 교포 백여 명이 남해안으로 밀항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곧이어 몇 차례 중국을 드나든 양용석씨가 정확한 날짜와 출발지도 밝히지 않은 채 부산으로 갈 관광 버스 2대를 예약해 둔 사실이 정보망에 잡혔다. 통상 대절료의 두배인 백만원을 선불한 사실도 확인됐다. 그런데도 사천경찰서는 보안을 유지하다 7월31일에야 경남 도경에 보고했다.

이에 대해 통영해경의 한 간부는 “경남도경이 정보를 준 건 밀항하기 겨우 몇 시간 전인 7월31일 오후 5시께였다. 우리쪽도 오전에 이미 정보 보고가 올라와 비상 경계령을 내린 후였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밀항 교포들은 해경과 해군의 ‘철통 같은’ 비상 경계망을 유유히 뚫고 들어와 한나절 이상 단체로 활보했다. 주민들은 “간첩선이 침투했을 경우를 상상하면 끔찍한 일이다. 해안 경비 체계가 이렇게 허술할 수 있는가”라며 분노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측은, 하선 장소에서 육지로 나오려면 남해대교 검문소를 거칠 수밖에 없어 결국 검거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휴대용 전화를 이용해 “해안에 안개가 끼었다(경계가 강화됐다).” “고기를 도매하기 어렵다. 소매가 낫겠다(교포들을 소규모로 여러 곳에 하선시키자).” 등 경선호와 음어 통화를 계속한 알선책 양씨의 치밀한 행동에 비해 지나치게 안이한 자세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해안 경계가 강화되자 하선 장소를 삼천포에서 남해로 바꾼 양씨는 검문을 피하기 위해 장의차나 냉동 차량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시신이 없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장의차 운전사가 그냥 돌아가면서 택시 기사 정씨에게 신고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경찰은 밀입국단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도망친 경선호 선장 김평호씨와 선원 김무용씨(31)를 아직도 붙잡지 못했다. 밀입국자도 검거한 64명 외에 1명이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신원조차 알아내지 못한 상태다.

중국 조직·국내 연결 고리 못 캐내

이처럼 허술한 해안 경비 체계와 소극적인 대응이, 중국 교포들의 밀항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높다. 밀항 사건을 담당하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검거자를 신속히 강제 퇴거시키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특히 중국 교포들의 경우는, 동포라는 점과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정밀 수사를 꺼리고 있다. 마산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지난해에도 7월16일과 17일 이틀 동안 교포 밀입국단 66명을 검거했으나, 모두 강제 퇴거시키는 데 그쳤다. 함께 검거한 중국 선박 2척의 선원 20명에 대해서도, 그중 4명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석방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쪽의 알선 조직이나 국내 연결 고리를 제대로 캐지 못해 바다 위에서만 숨바꼭질을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이후 중국 교포들의 밀항 사건은 대부분 북경 공항 근처에서 ‘고려주자’라는 주점을 경영하는 이정애 여인(36)이 알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사건 역시 국내 알선책인 양씨와 이여인의 합작품으로 밝혀졌으나, 아직도 중국 경찰과의 공조 수사는 추진되지 않고 있다.

국내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양씨는 제주선적 갈치잡이 어선인 제 777 경양호 선장 윤아무개씨(50)의 심부름으로 중국에 건너가 이재덕씨(31)라는 교포에게 5만달러를 전달한 후 ‘우연히’ 이여인을 만나 밀항 알선 제의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삼천포항 주변에서는 “밀항 총책은 윤선장이고 양씨는 그 밑에서 ‘수업’을 받은 중간책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윤씨는 밀수 사건으로 6월24일 구속돼 재판이 진행중인데, 이번 사건 수사에서는 제외됐다.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밀입국을 시도하다 검거된 사람은 지난해 99명에서 올해는 상반기에만 1백22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중국 교포로, 주요 루트로 이용되는 남해안 일대에서만 6월 말까지 47명이 검거됐다. 관계자들은 출국 시한을 넘겨 불법 체류중인 2만4천여 명말고도 밀입국 교포만 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내 취업 교포들 사이에는, 밀입국을 위해 대련 근처에 모여 있는 교포가 3천명, 대련 항에 ‘떠 있는’(이미 브로커에게 돈을 건넨) 사람만도 천명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막연한 ‘코리언 드림’에 부푼 현지 교포들과, 이들의 심리를 악용하는 알선 브로커, 허술한 해상 경비와 단발성 검거 작전이 개선되지 않는 한, 황해를 건너 오는 조선족 물결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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