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돈싸움 줄자 입싸움 감시 초비상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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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선거운동 자취 감춰… 흑색선전 위법성 따지기에 주력
92년 이맘때 같으면 선관위 직원들은 사조직 단속하랴, 금품 살포 현장 포착하랴, 각당 당원 단합대회 쫓아다니랴 발바닥이 부르틀 지경이었으리라. 그러나 올해에는 선거전이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도,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며‘행복한 직무 유기’를 즐기고 있다.

인력이 남아돌거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른바 ‘고비용·저효율 정치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선거법을 공영제 위주로 개정해 치르는 선거인데다가, 극심한 경제난 탓에 과거처럼 돈을 풀었다가는 가뜩이나 악화한 국민 감정을 자극해 집중 포화를 맞을 위험이 있어 정치권 스스로 돈 쓰는 선거 운동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청중 동원 사라져 돌아다닐 일 없다”

달라진 선거 문화는 후보를 낸 정당의 당사, 선거 사무소, 선거 관련 단체의 중앙 본부가 자리잡은 서울에서 먼저 눈에 띈다.

서울에는 서울시 선관위를 비롯해, 47개 선관위 소속 2천5백여 명이 ‘공명 선거’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들 선관위 직원들은 특히 자치구 별로 선정된 ‘중점 감시 지역’을 돌아다니느라 바빴을 것이다. 대형 음식점이나 백화점·공원, 사람과 차량이 많이 오가는 길목, 전철역 등이 중점 감시 지역이다. 14대 대통령 선거 때 대규모 청중 동원이 이루어지고 금품이 오가는 등 온갖 불법·탈법 선거운동이 판쳤던 현장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정당 연설회가 ‘옥내’에 국한됨에 따라 대규모 청중 동원이 사라졌다. 더욱이 각 후보 진영은 ‘새물결 유세단’ ‘파랑새 유세단’ ‘모래시계 유세단’ 등을 만들어 이번 대선부터 허용된 거리 유세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사람을 동원하기보다는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서울시 선관위 안병도 지도과장은 “자치구 별로 중점 감시 지역을 설정했지만 이제는 그런 지역을 설정하는 일 자체가 의미를 잃었다. 광장이나 공원은 이미 선거운동 장소로서 매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선거 사무에 종사해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라고 말한다.

선거법 엄격하지만 고발 1건도 없어

서울시 선관위가 선거운동 기간에 불법 선거운동을 단속하기 위해 단속반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때는 지난 11월20일. 전임 직원 외에 특별단속위원·공익근무요원·자원봉사자까지 가세해 이루어진 선관위 조직은 대개 밤 12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제보를 받거나, 단속 사항을 점검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상황이 발생하면 이들은 비디오 카메라·일반 카메라·소형 녹음기 따위로 중무장하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현장에 출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황’ 자체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조를 편성해 주로 당사와 선거사무소에 들르고, 선거 벽보 따위의 훼손 상태를 점검하는 ‘시시한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소일’하고 있다. 정당·후보 연설회가 규정대로 옥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애드벌룬 따위를 규정에 맞게 띄웠는지, 표찰·표식을 자격 있는 사람이 소지하거나 착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 단속반의 주요 업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각 후보 진영이 선거법 위반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 11월28일 한나라당의 의정부시 정당 연설회 때, 주최측이 관광 버스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청중을 끌어모은 예가 대표적이다. 아직 중앙선관위 차원의 판단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경기도 선관위와 동두천시·양주군 선관위가 자체 조사를 해 이 날 한나라당의 일부 관계자가 관광 버스를 빌려 청중에게‘편의를 제공한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중앙선관위에 보고했다.

또 지난 12월2일 중앙선관위는 국민신당이 서울 시내 지하철역에서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중앙일보 보고서 파문’ 내용을 담은 당보를 배포한 일을 적발해 배포 중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당보 배포는 선거운동 기간에 2회 허용되며, 그것마저 통상적인 방법으로만 배포할 수 있어, 거리에서 일반 유권자에게 공공연하게 나눠주는 행위는 위법으로 간주된다.
선거법이 이처럼 엄격해졌는데도 선거운동 기간 개시 이후 현재까지 중앙선관위에 보고 또는 접수된 ‘선거법 위반 사항’은 10여 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수사 의뢰나 고발 조처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그만큼 횟수나 강도 면에서 불법 선거운동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중앙선관위 조장연 사무관은 “14대 대선 때 같으면 아예 무시될 정도의 미미한 사안까지 세심한 점검 대상이 되고 있다. 정당연설회, 그것도 한 곳에 국한된 정당연설회에 버스 몇 대 동원하는 것이나,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에게 당보 몇 장 돌리는 일은 14대 대선 때에는 적어도 선관위에서는 전혀 얘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일에 선관위는 진위를 가리기 위해 정식으로 조사권을 발동하고 자료 제출까지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유권자 태도 진지… 공명선거 자리잡을 듯

단속반 일이 크게 줄어든 대신 관리반 사무는 늘어났다. 후보자 초청 토론회, 방송 연설회, 그리고 이번 대선에 처음 등장한 후보자 합동 토론회 등 주로 신문·방송을 통한 선거운동 기회가 대폭 늘어난 데서 오는 현상이다. 그래서 관리 부서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중앙선관위 윤원구 관리과장은 “대선과 관련 없는 정당부·기획관리부 직원까지 총동원해 대선관리단을 발족했는데, 특히 관리반쪽 업무가 폭주하고 있다. 관리반이 방송 연설 따위 주로 신문·방송과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선거전 양상이 신문·방송 등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각 후보가 설전을 벌이는‘고공전’으로 펼쳐짐에 따라, 선관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후보자간 상호 비방과 흑색 선전의 수위에 특히 신경을 쏟고 있다. 후보자간 설전은 대개 ‘언론 보도’ 형식으로 세상에 공개되기 마련이어서, 선관위 직원들은 사무실에 앉아 그날그날 정당·후보자의 발언 내용을 점검하는 일이 잦아졌다. 말하자면‘돈싸움’에서‘입싸움’으로 선관위의 감시 내용이 바뀐 셈이다.

입싸움 시비를 해결하는 열쇠는 정당·후보자의 발언이 얼마만큼 ‘허위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가리는 부분이다. 선관위는 비록 이번 대선부터 발언의 진위를 가릴 수 있도록 진상을 조사할 권한을 정식으로 부여받았지만, 허위 사실을 가리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번 선거 관리에서 가장 난감한 부분이 바로 상호 비방과 흑색 선전의 위법성을 따지는 일이다. 상호 비방 부분은 대개 언론에 보도된 뒤 문제점을 찾아내는 사후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다가, 그같은 비방이 공공성에 바탕을 둔 경우에는 국민의 알 권리와 부딪쳐 시비를 따지기가 모호한 때가 많다. 예컨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기피 논란이나, 김대중 후보의 건강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대표적이다”라고 중앙선관위의 한 직원은 털어놓는다. 선관위 직원들이 이번 대선을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선거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선관위 직원들은 이번 대선이 역대 어느 선거보다 공명하게 치러질 것이라는 점에는 확신에 가까운 전망을 내놓는다. 한 예로 지금까지 접수된 사전 선거운동 건수는 1백34건인 데 비해 14대 대선 때는 같은 기간에 3백29건이었다. 14대 대선 때 선거운동 기간을 전후해 극심하게 판을 쳤던 선심 관광이나 교통 편의 제공 사례도, 올해 대선에서는 적어도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단 1건도 선관위에 적발되거나 보고되지 않았다.

“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일반 유권자들의 바뀐 태도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한 위기 의식이 고조된 탓인지, 대선에 임하는 유권자들의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느껴진다”라고 서울시 선관위 안병도 지도과장은 말했다.

변한 분위기가 선거전 막판까지 이어질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모처럼 깨끗해진 선거판을 끝까지 유지할지, 다시 혼탁 양상으로 끌고 갈지를 결정하는 열쇠는 정치권이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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