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갈팡질팡‘우유 불신’ 조장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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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항균 물질 검출 ‘섣부른’ 발표… 우유업계 공멸 위기
‘마의 일요일’이었다. 지난 10월22일 일요일 밤 MBC TV가 ‘유방염에 걸린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소비자가 마시고 있다’고 보도한 뒤 우리 사회는 한 달 넘게 사상 초유의 ‘우유대란’을 치르고 있다.

선혈이 낭자한 싸움터에 승자는 아무도 없다. 낙농가와 유업계는 도산 직전이라며 아우성이고, 싸움을 진정시켜 보겠다고 나선 행정 당국은 싸움판을 더 크게 만들고 말았다. 행정 당국의 위신과 공신력은 바닥에 떨어진 상태이다. 마침내 11월22일에는 주무 부처인 농림수산부와 보건복지부 장관이 만나 슈퍼마켓에서 우유를 사 마시는 ‘그림’까지 연출했지만 사태가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소비자는 날이 갈수록 누구도 못믿겠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에 낙농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30여 년 만에 최대 위기로 기록될 만한 이번 파동은 고름 우유 논쟁→체세포 수 논쟁→항생·항균 물질 잔류 논쟁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았다. 논쟁에 따라 전선도 업체간, 업체 대 정부, 소비자단체 대 정부로 점차 확장되는 형국이다. 문제는 논쟁이 거듭될수록 논쟁의 성격 또한 심화돼야 할 텐데 그것이 여전히 문제의 언저리만 훑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논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 라운드:고름 우유·체세포 수 논쟁

MBC가 ‘유방염 젖소’ 보도를 한 직후(10월24일) 파스퇴르유업은 ‘우리는 고름 우유를 절대 팔지 않습니다’는 신문 광고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파스퇴르는 초창기부터 체세포 검사를 통해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해왔으므로 다른 업체들과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우리 회사 우유는 안전하다’는 광고를 각개전투 식으로 내보내던 다른 우유 회사들은 곧 한국유가공협회의 이름 아래 단일한 대오를 갖춰 ‘파스퇴르우유는 고름 우유임이 밝혀졌습니다’라는 비방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10월30일). 파스퇴르의 원유에도 수십만 개의 체세포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쌍방의 비방 광고는 보건복지부의 시정 명령, 농림수산부의 중단 지시를 거쳐 11월6일 쌍방이 비방 광고를 중단하기로 합의할 때까지 계속됐다.

제2 라운드:항생·항균 물질 검출 논쟁

파스퇴르유업과 한국유가공협회의 공방이 가열되는 동안 보건복지부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판매중인 우유를 수거해 항생물질 잔류 검사를 실시한 결과 어느 제품에서도 항생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11월1일). 그러나 뒤이어 한국소비자연맹이 자체 검사를 해본 결과 우유에 항균제 잔류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자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에 재확인 검사를 의뢰했다(11월9일). 한국소비자연맹은 식품공전에 규정된 색소환원시험법(TTC 방법)으로는 검출되지 않는 항균물질이 자기네가 다른 시험법(펜자임 테스트, 델보 테스트 등)을 사용한 결과 검출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 보건복지부는 기존 TTC 방법과 함께 최첨단 기법으로 꼽히는 방사선 동위원소법(Charm Ⅱ 법)과 고속 액체 크로마토그래프법(HPLC 법)을 함께 사용했다. 그 결과 13개사 24개 제품 가운데 동서식품·두산종합식품·연세유업·삼양식품·서주산업 제품에서 0.0004~0.0027ppm에 이르는 미량의 항균물질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11월20일).
우유는 동물성 단백 식품 가운데 영양가가 가장 높은 식품이다. 반면 세균이나 미생물에 감염되기 쉬운 취약성을 지니고 있어 현행 축산물위생처리법 등 관련 법규는 우유의 생산·처리·가공 등 모든 과정에 철저한 검사가 이루어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업 회사들은 농가에서 실어온 원유에 대해 세균 수 검사, 체세포 수 검사, 지방 함량 검사, 항생·항균 물질 잔류 검사, 소독제 잔류 검사를 하고 있다. 이 때 세균 수·체세포 수·지방 함량 검사 결과는 우유 등급을 나눠 단가를 책정하는 데 쓰인다. 고름 우유 논쟁 당시 문제가 됐던 체세포가 이것이다.

건강한 젖소에서 나온 우유에는 1㎖ 당 체세포가 5만~25만개 가량 들어 있는데 이 가운데 60∼70%가 상피 세포이고 나머지는 백혈구이다. 젖소가 질병에 걸리면 체세포 수가 크게 늘어난다. 질병에 대항하는 백혈구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유 1㎖ 당 체세포 수가 2백만∼3백만개로 늘었을 때 백혈구 비중은 90%를 웃돈다. 이쯤되면 젖이 잘 나오지도 않거니와 육안으로도 고름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체세포 수는 우유의 질을 나누는 기준일 뿐이지 마실 수 있나 없나를 나누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위 도표 참조). 정충일 교수(건국대·낙농학)는 “체세포 수를 따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이다. 그만큼 우유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얘기이다. 우유를 만든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입으로 ‘고름’ 운운하는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검사 비켜가려 더 해로운 항생제 사용

그러나 항생·항균 물질은 다르다. 항생제는 젖소의 유방염 치료에 주로 쓰이고, 항균제는 설사와 산후 조리 등에 쓰이는 약품이다. 넓게 보아 항균제도 항생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우유 단가를 책정하는 세균 수·체세포 수 검사와 달리 항생·항균 물질 잔류 검사는 합격·불합격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현행 식품공전 규정에는 잔류 허용 기준이 아예 없으므로 항생·항균 물질은 조금만 검출돼도 불합격 처리된다. 문제는 이를 검사하는 방법이 TTC 방법 한 가지로 규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항균물질이 검출된 다섯 회사 제품도 대부분 TTC 방법으로는 검출되지 않던 것이 Charm Ⅱ 법과 HPLC 법에 의해 검출된 것이다.

항생제는 크게 페니실린·베타락탐·설파 계열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TTC 방법으로는 설파 계열 항생·항균 물질이 검출되지 않는다. Charm Ⅱ 법을 이용하면 설파 계열 항생제를 비롯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항생·항균 물질 대부분이 검출되지만, Charm Ⅱ 검사 기계가 대당 3천만~4천만원을 웃도는 데다 유지비·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들기 때문에 국내에는 7대만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유가공업체 가운데 이 기계를 갖춘 곳은 ㅅ사와 ㅍ사 두 군데뿐이다.

설파 계열 항생제는 페니실린 계열에 비해 잔류 기간이 길고 부작용이 많다는 문제점이 제기돼 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부작용을 알면서도 검사를 비켜가기 위해 설파 계열 항생제를 이용해 온 낙농가가 일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설파 계열 항생제로는 ㅅ사의 ‘킹마스티’, ㄱ제약의 ‘네오유방연고’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들 약품을 사용하면 TTC 검사에서 잔류 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 천안에서 젖소를 기르는 한 목부는 “낙농가 대부분은 양심적인 편이다. 그러나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다급해지면 손을 뻗게 된다”고 고백한다.

설파 계열 항생제 사용은 관련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번에 항균물질이 검출된 한 유업 회사 관계자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걸핏하면 우유 수급 균형이 맞지 않아 낙농가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판에 어떻게 규정(TTC 법) 외의 검사까지 하겠다고 덤비겠는가”라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물론 업계의 이같은 호소는 변명일 수 있다. 단기간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법규를 핑계로 국민 건강을 적극 보호해야 할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를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한국유가공협회 윤남경 차장은 “정부가 앞장서 검사 방법 개선을 유도해 왔다면 아무리 투자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기업체 또한 정부 방침을 따랐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분석 기법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20년 전 규정한 방법(TTC 방법은 76년 채용됐다)을 정부가 그대로 고수한 데서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라고 지적한다.

정부가 법규를 시대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는 거꾸로 지금 정부의 목을 죄고 있다. 이번에 보건복지부는 항생물질이 검출된 업체 가운데 동서우유를 제외한 나머지 네 회사에 대해 어떠한 행정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검출된 양이 적어서가 아니다. 현행 법규상 TTC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검출된 항생·항균 물질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우유의 경우는 TTC 방법으로 항생물질이 검출됐기 때문에 1개월간 유제품 제조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때문에 빗발치는 항의를 받은 보건복지부는 11월20일 올해 안에 검사 방법을 개정하고, 항생·항균 물질에 대한 잔류 허용 기준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등급별 원유 단가 현실화가 근본 대책

문제는 바로 이 잔류 허용 기준이다. 보건복지부가 제품에서 항균물질이 검출된 다섯 업체의 명단을 발표한 후 우유 판매고가 전반적으로 급감하고 도산 위기에 처한 낙농가·대리점이 속출했다. 그러자 보건복지부는 서둘러 “이번에 검출된 수치는 선진국의 항균물질 잔류 허용치 0.1ppm에 훨씬 못미치는 수치로,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다”고 발표했다. 항균물질 잔류 의혹을 제기했던 한국소비자연맹의 정광모 회장 또한 “이것이 인체에 해를 미치는 수준이 아님을 인정한다. 단, 적은 양이나마 아예 검출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고,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외국처럼 허용 기준을 명확히 정하자는 뜻에서 재검사를 촉구했던 것이다”라며 사회적 파급 효과를 헤아리지 않고 검사 결과부터 덜컥 발표해 버린 보건복지부의 경솔함을 질책했다.

특히 이번 보건복지부 발표에서 대기업은 모두 빠진 채, 다섯 회사 매출액 전체를 합쳐도 전체 우유 시장에서 10%를 넘지 못하는 ‘피라미’들만 걸린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두산과 삼양은 대기업이지만 우유가 주력 품목은 아니다). 보건복지부 발표가 있기 직전 한국소비자연맹이 열다섯 회사의 제품 32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자체 조사에서는 다섯 회사 8개 제품에서 항균물질이 검출되었다. 이 가운데 두 회사는 대기업이었다.
사태는 이미 대기업·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악화하고 있다. 제조 정지 처분을 받은 동서식품은 물론,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은 나머지 네 업체도 이미 사회적으로 가매장된 상태나 다름없다. 연세우유의 경우 하루 평균 2백40t 가량이던 우유 판매량이 11월23일 현재 70t으로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같은 날짜 두산종합식품의 경우는 평균 47t에서 13t, 삼양식품은 1백24t에서 70t으로 각각 판매량이 줄어들었다. 판매 감소는 이들 업체만 겪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유가공협회 관계자는 “이들 다섯 회사에 납품하지 못한 낙농가들의 우유를 대신 사주는 등 다른 업체들도 낙농가의 도산과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코가 석자다. 고름 우유 논쟁 직후 10~15% 가량 떨어졌던 우유 판매고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개탄한다. 실제 항균물질 검출과 아무 관련이 없는 ㄴ유업의 광명시 한 대리점의 경우 하루 75상자 정도 나가던 우유가 23일 현재 42상자밖에 나가지 않는다.

돌파구는 우유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윤남경씨는 “오늘의 우유 파동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우리의 낙농 현실을 구조 조정기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년 전부터 이미 낙농가는 매년 평균 5천~만 가구씩 줄어들고 있고, 2000년께에는 전체 낙농가가 1만5천 가구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그는 “우유도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 그러한 경향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사실 최근 몇년 사이 우유의 질은 엄청나게 좋아졌다. 이런 시기에 그간의 성과를 무로 돌릴 수도 있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 무척 유감스럽다”며 이번 파동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정부가 당장의 여론에 밀려 검사 방법을 강화하고 원유 등급을 재조정하는 데 매달리기보다는 등급에 따른 원유 단가를 현실화해 낙농업자의 질적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정충일 교수는 또한 검사 방법을 강화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사전 검사 제도 정착이라고 강조한다. 검사를 아무리 정밀하게 한들 표본이 됐던 우유가 이미 제품이 된 다음에 검사 결과가 나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공장에서 원유를 탱크에 부리기 전에 차를 몇 시간 대기시켜서라도 검사를 철저히 마칠 수 있는 제도의 법제화를 제안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임기응변이 아닌 정공법으로 풀어가는 것, 그것만이 우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유일한 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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