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사 '도로아미타불'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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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은행 설립, 검찰·경찰 주도권 싸움 탓에 6년째 허송 세월

사진설명 "우리가 맡아야" : 검참은 자신들이 유전자 은행을 지휘해, 기결수만을 상대로 유전자 감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대검 유전자감식실.

요즘 범인들은 우발 범죄를 저지를 때를 제외하고는 지문을 남길 만큼 어리숙하지 않다. 따라서 최근 들어 유전자 감식 기법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유전자 감식 기법은 범행 현장에 남은 체모·체액·혈흔 등에서 개인적 특성을 지닌 고유의 유전자 형태를 분석해, 용의자와 범인의 일치 여부를 가린다. 관계 기관 연구원들은 머리카락 한 올만 있어도 범인을 100% 식별할 수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이 기법은 신뢰도가 높다.

이를 근거로 수사기관들은 범죄자의 유전자를 따로 모아 만든 유전자 은행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스스로 집착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들은 유전자 은행을 설립해 달라고 정부에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유전자 은행을 만들면 날로 지능화하고 흉폭해지는 범죄를 사건 초기에 종결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강간·강도·살인·마약 따위 강력 범죄는 재범률이 높다(약 50%). 게다가 사건 특성상 혈흔·정액 등을 통한 유전자 감식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때가 많다. 따라서 사건 초기에 현장 감식 결과를 유전자 은행 자료와 대조하면 재범일 경우 범인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또 유전자 은행에 등록된 전과자들은 행여 머리카락 하나만 남겨도 검거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범행을 자제할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은행이 설립되면 탐문 수사와 제보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94년 총리실 산하에 수사과학발전위원회를 두고 유전자 은행 설립을 검토했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 진전이 없다. 위원회는 단 두 번 열렸을 뿐이다. 유전자 은행 설립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검찰과 경찰이 서로 유전자 은행의 주관 부서가 되겠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 더 큰 이유다.

경찰과 검찰은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서 은밀하게 각자 유리한 방향으로 유전자 은행을 만들려 하고 있다. 경찰청 유관 기관으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가, 대검 산하에는 과학수사과가 있다. 검·경 관계자들은 과학 수사 기구 이원화는 필요하지만, 유전자 은행은 반드시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먼저 1994년 유전자 은행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법무부를 통해 국회에 상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찰도 내부에서 꾸준히 입법화를 준비해 왔다. 검·경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과학 수사의 핵심인 유전자 정보를 먼저 확보하는 기관이 수사권의 중요한 거점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불만은 대단하다. 경찰 산하이던 국과수가 행정자치부 외청으로 있는 것 자체가 경찰의 힘을 줄이려는 검찰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보는 데다, 자기들이 10년간 주도한 유전자 분석마저 검찰이 가로채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무 부서의 한 경찰관은 "수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유전자 은행은 경찰이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경찰의 이런 불만 뒤에는 수사권이 없는 데다 검찰에게 유전자 정보마저 넘겨주면 안된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경찰의 한 고위 간부는 "검찰이 몸집을 불리는 것은 검찰로서도 불행한 일인데 왜 경찰이 할 일까지 떠맡으려는지 모르겠다"라고 꼬집었다.

경찰은 자신들의 산하 기관 격인 국과수가 유전자 감식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유전자 감식은 영국이 1985년 최초로 도입했고 우리나라는 1991년 국과수가 도입했다. 국과수는 1991년 유전자분석실을 설치한 뒤 강력 사건을 많이 해결했고, 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KAL기 괌 추락, 1999년 경기도 화성 시랜드 화재 등 대형 참사에서 형체가 명확하지 않은 희생자의 신원을 밝혀내기도 했다.

국과수는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2000년 2월 유전자감식센터를 만들었고 부산·광주·대전에 분소를 두고 있다. 이처럼 국과수는 실적과 규모에서 국내 최고라고 자부한다. 국과수는 10년간 감식한 자료 2만건을 가지고 한국인 유전자 표준형을 연구하고 있다. 12월1일에는 유전자 은행 관련 국제 학술 발표회를 열었다.


인권단체 "유전자 채취·관리 계획 취소하라"

검찰은 법적 근거와 인권을 내세워 경찰과 맞서고 있다. 경찰처럼 용의자를 대상으로 유전자 은행을 만들면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지만, 기결수를 대상으로 하면 그런 부작용은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경찰은 모든 범죄자가 실형을 사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들 방식이 범죄 수사에 유리하다고 반박한다.

검찰이 1994년 상정했던 법률안을 보면 유전자 정보를 추출할 대상자를 강도·강간·살인 등 열한 가지 범죄 중 한 가지 이상을 저질러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기결수로 규정했다. 또 검찰은 정보를 사법경찰관·행정관청·연구자에게 공유시켜 정보 독점 시비를 막으려고 했다. 대검 이문호 과학수사과장은 "법안을 다시 손질하고 있지만 입법 계획은 아직 없다"라고 말했다.

검·경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이 샅바 싸움은 총리실이나 대통령이 나서야만 끝날 듯하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은 2001년도 법무부 예산안을 심의하면서 검찰과 국과수가 유전자 은행 주관 부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며 주관 부서를 하루빨리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런 와중에 행자부 외청으로 있는 국과수가 검찰이나 경찰로 아예 적을 옮겨야 할 때가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행자부 조직정책과 관계자는 "국과수는 행자부 산하에 계속 둘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검 이승환 유전자분석실장은 "소모적 싸움보다는 기관마다 조금씩 다른 유전자 분석 기법을 국제 규격에 맞게 표준화해, 만에 하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방지하는 연구가 현실적으로 더욱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검·경의 유전자 은행 싸움에 인권단체는 냉소적이다. 이미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날인 제도를 두 축으로 하는 국가 감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부가 범죄 수사를 위해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사용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등 인권단체는 12월1일 성명을 내고 범죄자 유전자 채취 및 관리 계획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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