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고 해체' 계획된 수순인가
  • 김은남·고재열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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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청, 관선 이사 선임→재단 복귀 승인 석연찮아…
"전교조 다수 학교에 철퇴" 음모론 제기


사진설명 언제 공부하나 : 상문고는 끝내 신입생 4백60여 명이 자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사진은 학교 정상화와 재배정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2∼3학년 학부모. ⓒ시사저널 안희태

한 공동체를 풍비박산 내면서 '상문고 사태'는 막을 내렸다.
1994년 교사 8명이 양심 선언을 해 상문고(학교법인 동인학원) 교장 상춘식씨의 추악한 비리 행태가 세상에 알려진 데 이어 7년 만에 이 학교가 다시 사학 분쟁의 핵으로 떠오르자 일반인은 상문고 하면 고개부터 내젓게 되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일반의 통념처럼 상문고가 7년 내내 '골치 아픈 학교'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학교는 민주적·자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투명하게 재정을 집행해 서울 강남의 명문 사학 중에서도 독특한 입지를 구축해 오고 있었다.

"큰아들이 상문고에 다닐 때 학부모들이 학교 행사에 쓰라고 후원금을 모아 선생님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이가 통장과 도장을 가져왔다. 선생님이 주셨다는 통장 속에는 '마음만 받겠다'는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맹세코, 강남에 이만한 학교는 없다"라는 것이 학부모 조종화씨(46)의 말이다. 큰아들에 이어 둘째아들이 올해 상문고에 입학했다는 조씨는 '큰아들의 모교를 지키겠다'는 각오로, 수업 파행의 와중에도 둘째를 굳건히 학교에 보냈다.

상춘식씨가 물러나고 관선 이사가 네 차례 파견되는 동안 상문고는 찬조금 없는 학교로 거듭났다. 지난 7년간 이 학교는 학교발전기금을 한푼도 모금하지 않았다. 학교 매점은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었고, 입학할 때 매점에 100원을 투자한 학생은 매년 7천원 상당의 수익금을 되돌려 받았다. '졸업 앨범을 보고서야 비로소 학생회장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학생회도 정상화했고, 동아리도 활성화했다.

이렇게 일군 공동체는 지난해 상춘식씨의 부인인 이우자씨가 이사장으로 복귀하고, 2001년 새 학기 들어 이씨가 임명한 교장이 학교에 취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패 재단 척결을 외치며 결속했던 공동체는 서울시 교육청이 '학생이 원할 경우 다른 학교로 편입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방침을 천명한 뒤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자퇴 신청이 마감된 3월16일 현재 1학년 신입생 중 상문고를 자퇴한 학생은 4백62명, 학교에 남은 학생은 100여 명에 불과하다. 2학년 또한 4분의 1 가까이가 학교를 떠났다.

학부모들은 각각 '싹수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에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느냐'(자퇴 학부모)와 '자기 자식만 잘되라는 이기주의가 과연 진정한 교육이냐'(남은 학부모)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학생은 학생대로 '마마보이, 배신자' '현실을 모르는 얼간이'라며 떠나고 남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2년 전 상춘식-이우자 씨를 재단 이사장으로 복귀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교육청에 제출하기도 했던 친 재단파 교사('상문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사 모임')와 전교조 조합원을 주축으로 한 반 재단파 교사('상문고 정상화 대책위원회') 간의 해묵은 갈등은 이번 사태로 더욱 골이 깊어졌다.


사립학교법 "비리 임원도 2년 후 복귀 가능"


그렇다면 상문고를 이렇게 만든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국회 개혁파 의원들이나 교사·학부모 단체가 수 차례 지적한 대로, 궁극적인 책임은 사립학교법에 있다. 1999년 8월 '개악'된 사립학교법은 임시 이사의 재임 기한을 2년(중임 가능)으로 축소하고, '이 법 시행 당시 재임 중인 임시 이사의 임기는 1999년 12월31일까지로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따라 당시 상문고에 파견되어 있던 4차 관선 이사진은 12월 말 서둘러 옛 이사진을 복귀시켰다. 비록 비리와 횡령으로 얼룩진 옛 이사진이나마, 이들이 복귀하는 데 법적인 제약은 없었다. 현행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비리를 저지른 임원이라 할지라도 임원 취소 후 2년이 지나면 학교에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우자씨가 상문고 이사장에 복귀하도록 승인했다가 교사·학생·학부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두 달 만에 승인 결정을 뒤엎은 서울시교육청은 이우자씨가 서울행정법원에 낸 소송에서 지난해 6월29일 패소했다. 이에 따라 상문고 사태와 관련해 지난해 국정감사에 출석한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은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행정력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악법만이 문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상문고 구성원들은 말한다. "상문고를 이렇게 만든 직접적인 책임은 교육 당국에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비리 재단이 연착륙하는 것을 도왔다"라고 이 학교 노정옥 교사는 주장했다.

이들이 교육 당국에 분노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제4차 관선 이사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서울시교육청이 고의든 실수든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4차 관선 이사진은 옛 재단이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관선 이사장을 포함한 일부 이사는 '횡령액 변상 문제가 해결된 만큼 법인 정상화를 미룰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들 이사가 옛 재단과 직·간접으로 친분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사장 이장호씨는 상춘식씨와 동향(개성)이어서 5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사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이사가 물러나면서 새로 선출한 정이사 5명이 상춘식씨 친구·군대 상관, 이우자씨 주치의 등으로 모두가 옛 재단의 측근이었다는 점 또한 이들과 옛 재단의 유착 고리를 의심케 했다(표 참조).

학교를 정상화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은 관선 이사진이 비리 재단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격이다. 그렇지만 교육청은 이같은 친분 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 유인종 교육감의 해명이다. 그보다는 중립적인 인사로 관선 이사를 구성해 파견했는데, 이들이 변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교육 당국이 범한 두 번째 잘못은, 이들 관선 이사가 서둘러 내린 '이우자 복귀' 결정을 교육청 또한 사흘 만에 서둘러 추인했다는 것이다. 민원이 제기되자 2000년 2월 뒤늦게 내부 감사를 벌인 교육청은 △학교 구성원 간의 갈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고 △상춘식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종료되지 않았으며 △관선 이사회 검토와 달리 옛 재단의 변제 금액이 6천만원 가량 부족한데도 다른 방법으로 이를 상계하면 임원 취임 승인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자의적으로 내림으로써 교육청 스스로가 절차상 사립학교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같은 절차상 과오보다 더 큰 잘못은, 옛 재단이 복귀할 경우 상문고 사태가 재연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이를 승인한 교육청의 무사안일함에 있다고 상문고정상화대책위원회에 속한 교사들은 비판한다. 올 들어 분규가 악화하는 와중에도 교육 당국은 무사안일·무원칙·늑장 행정으로 일관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관선이사 다시 파견해도 정상화 힘들 듯


사진설명 "모두가 희생양" : 자퇴하는 1학년 학부모들은 교육 당국에 강한 불신을 표시했다. ⓒ시사저널 안희태

교육청의 갈팡질팡 행정은 3월9일 발표한 이른바 '상문고 사태에 대한 대책'에서 극에 달했다. 이 날 교육청은 이우자 이사장에 대한 계고 조처를 단행했다. 계고는 관선 이사를 파견하기 위한 전 단계에 해당한다. 계고 기간(14일)이 지나도록 지적 사항을 시정하지 못하는 학교에 교육청은 관선 이사를 파견할 수 있다. 이는 29개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상문고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요구한 내용이기도 했다.

문제는 교육청이 계고 조처와 더불어 희망하는 학생에 한해 학교를 재배정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는 사실이다. '학생의 학습권 보호'가 그 명분이었는데, 학생·학부모에게는 이것이 '학교 정상화를 위해 남을 사람은 남고, 학습권을 위해 떠날 사람은 떠나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본래 재배정은 교육청을 압박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먼저 제기한 카드였다. 지난해에도 상문고생 8백78명은 전학 서류를 집단으로 작성한 일이 있다. 관선 이사 파견을 통한 학원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면 집단 전학이라도 불사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것인데, 교육청이 오히려 이를 악용해 우리 뒤통수를 쳤다"라는 것이 2학년 학부모 최재춘씨의 말이다.

교육청이 상문고를 해체하기 위한 순서 밟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음모설이 제기된 것은 이 때문이다. 상문고 정상화 운동에 깊숙이 개입해 온 최 아무개씨(동문 6기)는 "교육청이 이 기회에 골치 아픈 혹을 떼어 버리려고 작심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전교조 '소굴'인 데다(전체 교사 98명 중 전교조 가입 교사가 54명에 이른다) 재단과의 법정 싸움에서도 별반 승산이 없는 상문고를 교육청이 곱게 여겼을 리가 만무한 만큼 이번 사태를 폐교시킬 호기로 삼은 듯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선 이사가 파견된다 해도 상문고 정상화는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3월22일이면 이우자씨 임원 취임 승인 취소와 관련한 소송에 대해 고등법원이 판결을 내린다. 여기에서 교육청이 승소한다 해도 이씨측이 항소와 동시에 관선 이사에 대한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낼 가능성이 높으며, 지난해처럼 법원이 또다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다면 교육청은 관선 이사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교육청 법무 담당자의 설명이다. 만에 하나 국회에서 사립학교법이 개정된다 하더라도 상문고에 대한 소급 적용은 불가능하다.


상문고 '공중 분해 위기'에 책임지는 사람 없어


부패 재단의 탐욕과 감독 관청의 무사안일로 인해 한 학교가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는데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상문고의 현실이다. 부패 재단을 다시 불러들인 제4차 관선 이사진 7명은 이미 이사진에서 해임되었으므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서울시 교육청 감사의 결론이다.

1999년 말 이우자씨 복귀를 승인해 준 교육 공무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서울시교육청 감사에서 책임을 지적받은 공무원은 김○○ 국장·황○○ 과장·이○○ 사무관·전○○ 주사 모두 4명. 그러나 담당 국장과 주사는 각각 주의와 경고로 가벼운 문책을 받았다. 감사실이 경징계를 요구한 과장과 사무관은 징계위원회에서 '불문 경고'로 처벌 내용이 경감되었다. 불문 경고란 경고하되 불문에 부친다는 뜻으로, 가장 가벼운 등급의 문책이다. 감사 이후 승진한 김○○ 국장과 황○○ 과장은 현재 △△교육청 부교육감과 □□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상문고를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은 사람에게나 교육 당국은 지금 최대의 공적(公敵)으로 떠올라 있다. '제2의 상문고'를 막기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은 물론이고, 검찰이나 감사원이 나서 관선 이사 선정-옛 재단 복귀-교육청 승인으로 이어진 전과정을 엄정하게 재수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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