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의보 재정 파탄시켰나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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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야·이익집단 모두 '용서 받지 못할 자들'…
대책 제각각 '한심'


마녀 사냥이 시작되었다. 의료보험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언론은 정부와 의약 분업 정책 입안자를 걸고 넘어졌다. 정부와 청와대는 보건복지부(복지부)를 희생양으로 삼았고, 언론과 한나라당은 내각 총사퇴와 의약 분업의 새 틀을 주문하며 연일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미 의보 재정 파탄 청문회와 국정감사 이야기가 나오고, 증인석에 서야 할 사람은 누구라고 이름이 거론된다. 검찰이 복지부 내사에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사진설명 "이젠 안 속아" : 시민단체는 의보 재정을 파탄 낸 정부가 국고 지원을 늘리려고 하자 반대하고 나섰다. ⓒ시사저널 윤무영

의보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의약 분업이다. 의약 분업이 시작되면서 월 6천억원 규모이던 보험급여 청구비가 월 1조원을 훌쩍 넘어버렸다. 가뜩이나 통합을 앞두고 만성 적자에 시달려 오던 지역 의보(사회보험)나 직장 의보의 적립금 몇 천억원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국고 지원이나 다른 자금 수혈이 없다면 파산할 지경이다.

의약 분업을 추진해 온 주체였던 복지부·여당·야당·이익집단·시민단체 들은 의약 분업 실패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아울러 각 단체마다 다른 해결책을 내놓고 있어 의약 분업을 둘러싼 갈등이 또다시 재연될 조짐이다. 이런 이유로 의보 재정 파탄 위기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의사들과 시민단체들이 여당이 마련한 건강보험 재정 안정 대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여당은 최근 지역 의보에 대한 국고 지원 비율을 현재 30%대에서 50%로 늘리고, 수가 조정과 심사 평가를 강화해 의보 재정을 안정시키겠다는 대책을 마련했다. 이에 대해 20여 시민단체는 3월20일 '부당한 보험료 인상 반대와 건강보험 개혁을 위한 노동자·농민·시민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정부가 의약 분업 전후로 의료수가를 37.5%나 올리는 바람에 추가 비용 1조8천억원을 발생시켜 재정 위기를 초래해 놓고 또다시 보험료를 올려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최선정 장관은 철저히 의사 편이었다"


사진설명 강경파 : 신상진 전 의쟁투 위원장(왼쪽)과 김재정 대한의사협회 회장. ⓒ연합뉴스

의사들은 이런 여당과 시민단체의 지적은 말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전 의쟁투 간부는 "두 번의 수가 인상은 1999년 5월10일 의·약·정 합의에 따라 약값 실거래제 도입에 따른 경영 손실을 보전해 주려고 취한 조처였고, 2000년 9월 수가 인상은 수가가 실제 원가의 80%밖에 안된다는 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의사 사회는 최근 정부와 시민단체가 의보 재정 파탄 책임을 의사에게 돌리고 의사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며, 의쟁투를 다시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과 시민단체는 최선정 전 복지부장관이 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수가를 올려준 것에 의혹을 제기한다. 수가를 1% 포인트 올리면 전체 보험 재정 지출이 0.5% 포인트 가량 오른다는 것을 복지부에서 30년이나 재직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최장관의 실책은 또 있다. 그는 올해 초 국민 편의와 의보 재정 건전화를 이유로 주사제를 의약 분업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국회 보건복지위 위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2월 국회 상임위에서 주사제를 의약 분업에서 제외한다는 약사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 뒤늦게 여당이 의약 분업 원칙을 훼손한다며 부랴부랴 주사제를 의약 분업에 포함하기로 하고 진화에 나서 최장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는 주사제가 약물 오·남용의 주범이므로 반드시 의약 분업을 해야 한다고 홍보해 왔는데, 실무 책임자인 장관이 주사제를 의약 분업에서 제외하자고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까지 찾아가 설득했다는 사실에 여당 관계자들은 당혹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바로 그때가 최장관이 가면을 벗는 순간이었다. 그는 철저히 의사 편이었고, 의약 분업을 망친 장본인이다"라고 지적했다.


"의약 분업은 정책 실패가 아니라 행정 실패"


사진설명 지난 3월21일 경질된 최선정 전 복지부장관. ⓒ연합뉴스

복지부가 여당과 시민단체로부터 비판받는 것은 이뿐만 아니다. 현재 여당이 공개한 의보 재정 안정화 대책안은 이미 1999년 5월10일 의·약·정 합의안에서 복지부가 실행하기로 약속했던 것들이다. 차등 수가제·담합 방지·심사평가 강화 등 지금 다시 거론되는 모든 것이 의약 분업 이후 실시되어야 했다.

청와대도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청와대 복지수석이 당과 실무 부서인 복지부 간의 불협화음을 조율하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청와대가 말로만 개혁을 주장했지 개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당 전문위원으로 의약 분업을 추진했던 이상이 교수(제주대·예방의학)는 "복지부는 당연히 해야 할 행정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의약 분업은 정책 실패가 아니라 이익 집단에 휘둘린 행정의 실패다"라고 말했다. 그는 복지부가 신념을 갖고 의약 분업을 위해 행정 조처를 신속하게 실시했다면 의보 재정 파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처럼 여론의 뭇매를 맞는 복지부도 할 말은 있다. 최 전 장관이 어느 정도 의사 집단에 끌려다닌 점을 인정하지만 당과 청와대의 언질이 없었다면 수가 인상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복지부 보험급여과 관계자는 "우리 독단으로 수가 인상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정과 합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우리만 손가락질하고 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특히 9월 수가 인상은 복지부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공의 폐업이 장기화하자 고위 당정회의와 국무회의에서 수가를 현실화하라고 결정한 것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약 분업에 참여했던 복지부 관계자는 "당시 복지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의사들이 복지부가 아니라 대통령(청와대)을 나오라고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는 한나라당도 의약 분업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1994년 약사법을 개정해 1999년 7월 의약 분업을 실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1999년 12월 여야 합의로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정치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꼬집는다.

의약 분업 정책을 입안하고 처리했던 주체들의 현실 인식은 이렇게 엇갈린다. 의약 분업을 고민하는 인사들은 한결같이 "답이 없다. 답답하다"라고 말한다. 서로 너무 다른 해법을 주장해 이견을 좁히기가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보건사회연구원 최병호 박사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정부다. 정부가 어쨌든 이해 집단들을 모아놓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약 분업 수혜자인 의료계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결국은 '돈 더 내라'고 말하게 될 정부를 순순히 따를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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