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은 '날고' 복지는 '걸음마'
  • 정희상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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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재해 갈수록 다양화...노동부 판정 폭 다소 넓혀 '억울한 일'은 줄어들 듯
지난해 남편을 잃은 김혜란씨(40)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줄기찬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서울 행정법원이 김씨의 남편이 사망한 원인을 산업 재해로 보고 유족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이에 불복해 상소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잃은 뒤 중학생과 초등학생 두 자녀를 데리고 사는 김씨에게 근로복지공단의 이같은 처사는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L전자에서 근무하던 김씨의 남편 이동근씨(43)가 사무실에서 쓰러진 때는 지난 2000년 8월이었다. 당시 이 회사 영업 파트 팀장으로 일하던 이씨는 야근과 철야를 밥먹듯하며 보냈다. 그러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에게 의사는 간암 말기라는 청천 벽력 같은 판정을 내렸다. 이씨는 1년여 투병 생활 끝에 지난해 여름 사망했다. 부인 김씨와 회사 동료들은 과로로 간질환을 얻어 사망에 이르렀다며 업무상 재해 신청을 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인정을 거부했고, 유족은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서울 행정법원은 이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씨의 남은 가족에게 유족 급여를 지급해야 할 근로복지공단이 1심 판결에 불복해 곧바로 행정 상소를 낸 것이다.


법원이 보상하라고 판결한 직업병과 산업재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승복하지 않아 유가족이 애태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서울 신정동에 사는 장해심씨(40)도 그런 경우이다. 서울 ㄹ호텔 직원으로 일하던 장씨의 남편 김방현씨가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다 쓰러진 때는 1999년 9월7일이었다. 김씨는 당시 감원 바람에서 살아 남은 몇 안되는 직원으로서, 나간 사람들 업무까지 고스란히 떠맡아 과로를 되풀이하다 새벽 퇴근길에 집앞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침에 발견된 김씨는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이미 위독한 상황이었다. 이후 병원에서 1년여를 식물 인간으로 보낸 김씨는 2000년 9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5천여만원에 달하는 병원비와 초등학생 딸, 그리고 통곡하는 아내였다. 아내 장씨는 호텔측의 적극적인 증언과 도움으로 1심에서 유족 급여 지급 판정을 얻어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이 판결에 불복해 상소하는 바람에 밀린 병원비 독촉에 시달리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 전자파 장애’ 등 신종 직업병 날로 증가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이나 사립학교 교원연금공단과 달리 근로자 복지공단은 직업병 및 산업 재해에 대해 아직도 보수적이다.” 산업 재해 관련 소송을 주로 맡고 있는 법무법인 한강의 최재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산재 피해를 보고도 근로자와 유족들은 불가피하게 근로복지공단과 지루한 소송을 벌여야 한다. 지난해 최변호사가 담당한 산재 관련 소송만 100여 건. 최근 법원의 판결 추세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 및 질병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여서 승소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이에 불복해 행정 상소를 제기해서 유족이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는 2월부터는 바로 이같은 억울한 사례가 많이 줄어들 전망이다. 노동부는 최근 업무상 스트레스와 간질환에 대해서도 선별적으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재판부마저 신종 직업병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데 노동부가 사사건건 여기에 맞서는 것으로 비치는 현실을 부담스러워 한 데 따른 것이다.


해마다 업무상 재해를 당하는 근로자는 6만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중 요양 승인을 받는 업무상 질병자는 2천3백여명에 불과하다. 물론 모두가 요양을 신청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로복지공단과 회사가 산재 승인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처럼 근로복지공단이 직업병 판정에 인색한 것처럼 비치는 것은 시대 변화 추이에 따라 신종 직업병이 날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폐증과 소음성 난청이 직업병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과 달리 최근에는 뇌·심장·혈관 계통 질환과 근육·골격계 질환 등 신종 직업병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안연순 책임연구원은 “신종 직업병이라고 해서 갑자기 그런 질환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에는 권리 의식 없이 그냥 지나가던 질병도 이제 직업과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의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대가 왔다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컴퓨터 앞에서 전자파 장애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가 직업병 신청을 내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또 환자를 다루는 의사와 간호사가 감염된, 말 그대로 `‘직업병’에 걸린 사례도 적지 않게 보고되었다. 그동안 의사 24명이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되었다는 보고는 충격적이다. 또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 간호사의 감염 건수는 해마다 30여 건에 달한다. 이들에게는 주로 환자로부터 결핵·간염·수두 등이 옮았다.


재해 손실액, 노사분규 손실액의 4배


한때 직업병 또는 산재라고 하면 으레 생산직 근로자의 전유물로 알았지만 지금은 직업과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업무상 질병 및 재해를 호소하는 추세이다. 특히 사망 재해 발생 형태 별로 보면 뇌혈관·심장질환 등 개인 질환이 산업 재해로 더욱 악화한 경우가 전체의 28.3%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즉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가 급증한 것이다. 법원은 이같은 돌연사를 대부분 산업 재해로 인정하고 있다.


법원은 상급자의 지나친 업무 독촉과 스트레스 유발로 인한 질환과 사고도 산재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최근 서울 행정법원이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한상훈씨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IT분야 벤처 기업에서 전산실 차장으로 일하던 한씨는 2000년 5월 과로로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간암으로 사망했다. 한씨의 유족은 산업 재해로 인정해 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1년여 재판 끝에 한씨는 근무 중 상급자로부터 지속적으로 심하게 모욕적 대우를 받으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과로로 쓰러진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재판부는 지난해 11월27일 근로복지공단으로 하여금 한씨 사건을 업무 관련성 질환으로 인정하고 유족에게 급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산업 구조 변화에 따라 근로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다양해지고, 직업성 재해와 질환이 늘고 있지만 아직 대책은 허술하다. 과로와 격무로 인한 뇌졸중·심장질환·요통이 업무 관련성 질환의 절반에 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컴퓨터 단말기 사용이 급증하는 데다 공장 자동화로 인한 단순 반복 작업이 늘어나고, 한편에서는 구조 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직무 관련 스트레스가 크게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라고 말했다.


산업 재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4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에서는 매년 평균 8만9천명의 재해자와 1천4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사망률은 선진국에 비해 최고 30배에 이른다. 이로 인한 경제 손실액도 연간 7조3천억원으로 한 해 노사 분규로 인한 손실액의 4배에 달한다. 결국 고용 안정과 임금 인상 못지 않게 근로자의 재해 예방과 보건 문제 또한 노사가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인 것으로 보인다.
정희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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