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모 드러난 유신 정권 ‘사법 살인’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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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위원회 “인혁당 사건은 중정 조작”…유족들 “언론도 공범이다”
'인혁당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 이 말은 암울했던 1970년대 후반 유신 시절의 대표적 ‘유언비어’ 가운데 하나였다. 이 유언비어가 27년 만인 지난 9월13일 진실로 판명이 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그동안 이 사건 조작과 불법적인 수사·재판 과정을 조사해 전모를 발표한 것이다. 평소 공안 사건에 대해서는 논조가 다르던 신문들도 인혁당 사건 조작 발표는 너나없이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27년 전 모든 언론은 ‘폭력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한 무시무시한 조직 사건’이라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유가족의 상처는 아직도 깊다. 만일 사건 당시부터 국내 언론이 조금만 더 용기를 내 사건의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했더라면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원망 때문이다. 대다수 유족이 의문사위 진상 조사 발표장에 참석한 날 사형당한 우홍선씨 미망인 강순희씨(70)는 끝내 기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경기도 파주에 사는 강순희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기자라는 말만 들어도 전화받는 팔에 힘이 빠지고 전율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사형당하던 날 서울 시내 대부분의 신문사 편집국을 찾아가 울부짖으며 진실 보도를 요구했으나 내쫓지 못해 쩔쩔 매는 기색이었다. 그 날 두루미가 새끼를 깐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으면서도 정권이 사실을 조작해 억울한 젊은이 여덟 사람을 죽이려는 기막힌 사건의 내막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로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 관련자는 모두 8명(52쪽 표 참조). 젊은 시절 남편을 억울하게 잃은 사형수 부인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된 남편들의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 지난 27년간 거리에서 싸웠다. 남편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던 부인들은 당시 중앙정보부(중정)로 연행되어 ‘구명운동을 않겠다’ ‘내 남편은 간첩이다’라는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이들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은 물론 성희롱까지 가해졌다. 일부 부인들은 중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술서를 써주고 나왔다가 가책을 느껴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하거나 사제단에 양심선언서를 맡기기도 했다.



남편들이 처형된 뒤에도 중정 요원들의 감시와 사생활 침해는 계속되었다. 고 하재완씨 미망인 ○○○씨(68)는 “중정 요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미행했다. 영문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젊은 여자 근처에 낯선 남자들이 따라다니니까 바람 난 여자인 줄 알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의문사위가 진상을 발표한 뒤 부인들은 이제야 명예 회복의 첫 단추를 끼웠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중정 요원 따라붙어 ‘바람 났다’ 소문도



인혁당 사건은 유신 독재가 절정에 달한 1974년 중정 6국(이용택 국장)이 조작한 사건이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였다. 1964년 8월14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 조직 인민혁명당을 건설한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했다”라고 발표했는데 이것이 세칭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아무 증거도 없이 사건을 날조했다. 하지만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져 서울지검(이용훈 부장검사)이 기소를 거부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은 곤혹스런 처지가 되었다. 결국 검사 3명은 이 일로 옷을 벗어야 했다.



중정의 1차 인혁당 조작이 실패로 끝난 지 10년이 흐른 1974년 박정희 유신 정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대규모 유신 반대 운동과 학생 시위가 잇따르자 그 해 8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독재에 대한 항거를 잠재울 수 없다고 판단한 중정은 분단 상황을 악용해 재차 사건을 날조했다. 유신체제 반대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은 뒤 그 배후 세력으로 1차 인혁당 조작 사건 연루자들을 다시 엮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이번 의문사위 발표에 따르면, 중정 6국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 제10항 ‘중정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 업무를 조정 감독한다’는 규정에 따라 모든 수사를 총괄 지휘했다. 당시 수사관들은 물증이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첩보를 입수하거나 광범위한 내사를 벌인 일조차 없이 중정이 짠 각본대로 사건을 만들어 갔다고 실토한 것이다. 유일한 증거는 몽둥이찜질·통닭구이·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동원해 억지로 받아 놓은 조서뿐이었다.



의문사위는 당시 인혁당 사건 공판 조서도 허위로 작성되었음을 밝혀냈다. 고문에 못이겨 허위 자백한 모든 피고가 검찰에서 인혁당의 존재 자체와 중요 혐의를 부인했지만 공판 기록에는 시인한 것으로 기록했다.
유신 정권은 이들의 유언마저 조작했다. 사형수들은 사형장에서 최후 진술을 할 수 있고 이것은 사형집행명령부에 기록된다. 도예종씨의 경우 “조국이 하루속히 적화 통일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사형장 교도관은 “통일을 못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라고 했을 뿐 적화 통일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또 8명 전원이 종교 의식을 거부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사형장에 있었던 교도관들은 신앙 여부는 묻지도 않고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교수형에 처했다고 밝혔다.



27년 만에 비로소 피해자들은 명예 회복의 길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의문사위의 이런 진상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확정 판결이 번복되지 않는 한 희생자와 유족의 완전한 명예회복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재심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법부도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한국 대법원이 인혁당 관계자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신속 처형한 1975년 4월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해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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