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은닉의 달인’ 전두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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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7백억 추징 시효 만료 앞둬…골프·바둑 배우며 여유로운 생활



서울 연희동 95-4번지와 95-5번지. 주소는 다르지만, 문이 하나인 한집이다. 중간에 벽을 없애고 본채와 별채를 함께 사용한다. 대지 3백24평에 자리 잡은 이 대저택의 주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71). 연희동 대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3백65일 철옹성이다. 양쪽 골목에서 경호를 맡은 경찰이 차량을 검문하는데, 전씨가 허락한 차량만 통행이 자유롭다.


경찰이 상주하는 경호용 부스에는 통행이 허가된 차량 번호 70여 개가 정리된 명단이 붙어 있다. ‘월요일 아침 손님 이양우 3***.’ 이런 식으로 장세동·안현태 씨 등 측근들의 이름과 차량 번호가 요일 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명단에는 ‘골프선생’ ‘바둑선생’ ‘손자와 손녀 과외선생’의 차량 번호도 적혀 있었다.
공식으로 수입이 한푼도 없는 전씨 부부. 게다가 1천7백억원을 빚진 죄인이지만 골프와 바둑을 배우며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채무자인 전씨는 느긋하고 채권자인 정부는 초조하다. 오는 5월12일까지 전씨에게서 빚을 받아내지 못하면 추징 시효가 만료되고 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칼을 뺐다.


지난 2월7일 서울지검 총무부는 법원에 ‘재산 명시 신청’을 냈다. 재산 명시 신청은 재산이 있으면서도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의 재산 목록을 공개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하는 제도. 검찰이 재산 명시 신청을 낸 것은 더 이상 전씨의 재산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7년 대법원이 전두환씨에게 선고한 추징금은 2천2백5억원. 15대 대선 직후인 그 해 12월22일 전씨는 특별 사면·복권되었지만 추징금은 그대로 남았다. 추징금은 징역형과 별도로 부과되는 재산형이므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때부터 전씨의 은닉 재산을 두고 검찰과 전두환씨측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검찰은 1996년 검사 7명과 수사관 50여 명으로 전담반을 꾸려 전씨 재산을 집중 추적했고 1998년에도 재차 추적반을 두었다. 그래도 전씨측은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텼고, 검찰은 헛물만 켰다. 지금까지 검찰이 적발한 전씨 소유 재산은 1996년 6월11일 법원에 낸 추징보전 재산 목록이 전부다(표 참조).


한푼도 없다는 전씨측 주장과 달리, 검찰은 은닉된 비자금 규모를 1천4백억원대로 추정한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안기부를 통해 은밀하게 전씨 비자금을 추적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1995년 비자금 수사 당시 A4용지 30장 분량의 ‘치부책’을 손에 넣은 검찰은 청와대 경리과장 김종상씨가 관리한 가·차명 계좌 1백83개를 뒤졌다.
이 과정에서 쌍용양회 경리부 금고에서 사과 상자 25개에 보관된 현금 61억원(아래 사진)을 찾아냈고, 전씨를 압박해 2백5억원 상당의 채권을 건네받았다. 나아가 검찰은 전씨 비자금 가운데 8백42억원이 채권을 구매하는 데 흘러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이 채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한 산업금융채권, 장기신용은행이 발행한 장기신용채권이 절반이고, 일부는 국민주택채권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전씨가 스스로 제출한 채권과도 일련 번호가 이어져, 전두환씨 소유가 확실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전씨의 노련한 재테크 때문이다. 노태우씨가 부동산이나 예금에 비자금을 은닉한 것과 달리, 전씨는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추적이 불가능한 무기명 채권에 집중 투자했다. 무기명 채권은 백화점 상품권처럼 증서에 채권자가 표시되지 않는 채권인데, 소지인이 권리를 행사한다. 검찰이 무기명 채권의 일련 번호까지 확인했지만 더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무기명 채권이 갖는 익명성 때문이다.





검찰 “더 버티면 별채를 경매 부치겠다”


채권 소재도 오리무중이지만, 그 소재를 파악했더라도 전씨가 채권을 가지고 있을 때 직접 압류해야 법률적인 효력이 있다. 실제로 검찰은 무기명 채권을 압류했다가 돌려준 적이 있다. 검찰은 전씨의 사돈이 소유한 1백60억원어치 채권을 적발했다. 자금 추적 결과 전씨 비자금으로 구입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채권 소지자는 전씨의 사돈인 한국제분 이희상 사장이었다. 이사장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며 반발하자, 검찰은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뾰족한 수가 없지만 검찰은 관련 은행에 무기명 채권을 찾아갈 때 통보해 달라고 요청해둔 상태다. 검찰은 채권 회수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상황이고, 전씨측은 느긋하게 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추징금 시효는 3년. 강제집행 절차에 들어가면 시효는 중단되고 다시 3년씩 연장된다. 그동안 검찰은 두 차례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 시효를 연장시켰다.
이제 검찰이 시효 연장을 위해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 전두환씨 재산은 연희동 별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이순자씨(63) 소유다. 1969년 아버지 이규동씨가 이씨에게 물려주어 추징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검찰은 그동안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별채는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몰린 검찰은 날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서울지검 관계자는 “도리가 없다. 양심에 맡겼는데도 추징금을 안내고 버티면 별채라도 경매에 부치겠다”라고 말했다. 검찰로서는 최후 통첩을 한 셈인데, 전씨측 대변인 격인 이양우 변호사는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법원이 재산 명시 결정을 내리면, 전씨는 직접 법원에 출석해 재산을 자진 신고해야 한다. 출석을 거부하거나 허위로 신고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5백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추징금이란?,

범죄 행위로 취득한 금품은 몰수되는데, 몰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그 가액을 추징한다. 추징형은 벌금형과 달리 강제할 수단이 없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일당으로 환산해 강제 유치할 수 있지만, 추징금은 검찰이 은닉 재산을 추적해 민사 소송을 통해 받아낼 수밖에 없다. 몰수나 추징 시효는 3년이다. 중간에 1원이라도 받아내면 시효는 중지되고 다시 3년씩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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