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골프장 불법 취업한 ‘북한 출신 캐디’의 정체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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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강명자씨, 군 시설인 태릉골프장에 위장 취업 3년 6개월 동안 캐디 생활, 고급 정보 빼냈을 가능성
북한을 드나들던 한 미모의 조선족 여성이 신분을 위장해 국내 특수 시설에 불법 취업한 뒤 3년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전·현직 국가 고위층을 밀착 수행하는 골프 도우미로 일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2001년부터 태릉골프장에서 문순옥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캐디를 맡아온 옌볜 출신 강명자씨(34)이다. 강씨의 부모는 북한 출신이며 그녀도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현재 국적은 중국이고 가족이 사는 곳은 옌볜이다. 그녀는 한국에 위장 잠입하기 전에 친인척 방문 명목으로 북한을 출입해왔다

여느 불법 체류 조선족과 달리 신분이 불투명한 강씨가 취업해 일해온 곳은 태릉골프장이다. 태릉골프장은 국방부 소유로 군인공제회에 위탁해 운영하는 군 체력단련장 명목의 체육 시설이다. 관할 노원구청에는 이곳이 군사 시설로 등재되어 있다. 실제로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각부 장·차관, 국정원장 및 기무사령관, 각군 장성급들이 수시로 찾으므로 ‘특수 시설’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도 청와대 수석보좌관과 함께 이곳을 찾아 라운딩했다. 강씨가 3년여 동안 이곳에서 밀착해 따라 다니며 일거수 일투족과 대화 내용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전·현직 장·차관과 기관장, 군 장성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강씨의 정체는 그녀의 신분과 행적을 수상히 여긴 한 골프 고객이 오랜 기간 공들여 친분을 쌓아가며 접근한 뒤 집요하게 파헤침으로써 드러났다. 최근 <시사저널>을 찾아 이같은 사실을 제보한 골프 고객은 시민단체 선행칭찬운동본부 김상우 운영위원장(41)이다. 그는 “캐디 강씨는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와 같이 예쁘장한 얼굴에 얌전한 외모로 평소 말이 없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강씨의 언행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골프를 치러 가면 일부러 친밀감을 과시하면서 그녀의 신상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정보기관 간부 집에서 중국어 교사 노릇

김위원장은 “그녀는 부모가 북한 국적으로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중국에 살고, 태릉골프장 경기실장도 자기가 불법체류자인 것을 알지만 눈감아주었다고 말했다. 북한에는 친인척을 만나러 두 차례 방문했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년, 홍콩에서 1년 살았다고 했으며, 강명자라는 이름으로 6년 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일본어·러시아어·중국어에 능통해서 단순한 위장취업자가 아니라는 직감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캐디 강씨가 한동안 국가 정보기관 간부 집을 드나들며 중국어 교사를 한 사실도 귀띔해주었다고 말했다. 매주 캐디 업무가 끝나면 정보기관 관계자가 나타나 그녀를 직접 차에 태우고 서울 신내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가 베이징 대학 3학년인 그의 아들과 부인의 중국어 가정교사 노릇을 시켰다는 것이다. 김씨는 문제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문씨를 픽업해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정보기관 간부의 자동차 번호를 확인한 뒤에야 확실하게 그녀의 말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전·현직 국가 고위 공직자와 군 장성들을 지근 거리에서 따라 다니는 미모의 골프 캐디가 혹시 간첩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은 김씨는 먼저 이를 태릉골프장측에 알렸다. 북한 출신 불법체류자가 캐디로 고용되어 국가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문순옥씨에 대해 신원 확인을 해보라고 귀띔한 것이다. 그러나 제보를 받은 태릉골프장측은 조용히 문씨의 신병을 확보하는 대신 다음날 새벽 4시30분까지 모든 직원에게 신분증을 지참하고 집결하라고 공개적으로 지시했다고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문순옥으로 위장한 강씨는 피해버렸다.

이에 실망한 제보자 김상우씨는 문씨를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한편 수사가 시작된 뒤 <시사저널>을 찾아와 그간의 내막을 제보했다.

김씨는 지난 8월 초 캐디 강씨의 거주지 관할 구리경찰서에 신고한 뒤 경찰관들과 강씨의 자취집을 덮쳤으나 그녀는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결국 이 문제를 대공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한 구리경찰서 보안과는 8월16일에야 그녀를 체포한 뒤 이튿날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죄로 구속 송치했다.

경찰 조사 결과 강씨는 당초 중국에서부터 위장 잠입 목적으로 여권을 위조해 김양숙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다시 태릉골프장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인 문순옥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그녀가 중국·북한·러시아를 오간 사실을 확인했고, 가족이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는 점은 국제 통화로 확인했지만, 그녀가 지난 3년 6개월간 태릉골프장에서 행한 활동 내역과 대공 혐의점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구리경찰서의 한 수사 관계자는 “강씨의 신원과 행적을 확인하니 북한과 러시아를 다닌 것은 확실하지만 탈북 여성이나 공작원이라는 혐의는 잡아낼 수 없었다. 보름 정도 북한에 머물렀다고 자백하는데 그 정도로 대공 혐의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전 내사 없이 그녀의 신병을 확보한 뒤 본인 진술에만 의존했기에 대공 용의점을 수사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경찰은 그밖에 태릉골프장에서 그녀를 불법 취업시킨 경위와 불법체류자임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 강씨가 만났던 정보기관 관계자 등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연히 조사의 기초 자료 중 하나인 태릉골프장의 캐디 일지도 확보하지 않았다. 경찰은 강씨의 본인 진술에 의존해 충분히 수사하지 않고 서둘러 단순한 위장취업자로 결론을 낸 것이다. 결국 그녀가 3년 6개월 동안 신분을 위장해 태릉골프장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는 셈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수사 관계자는 “경찰로서도 그녀를 강제 출국시키면 3년 6개월간 모은 정보가 고스란히 북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고 일단 구속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현재까지 강씨의 정체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의혹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녀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정부 고위층 인사들과 군 장성들이 자주 출입하는 특수 시설에서 정보를 빼내려고 들어와 3년여 동안 암약한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 정보기관이 심어둔 망원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이다. 경찰에서는 이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어느 쪽으로든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한국군 정보기관이 불법체류자인 그녀의 신분을 알고 채용해서 활용했다면 이는 정부 고위층을 상대로 한 고도의 비밀 불법 사찰행위 시비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강씨가 김상우씨에게 군 정보기관 출신인 태릉골프장의 경기실장이 자기 신분을 알고 있고 도와주고 있으며, 다른 정보기관 간부가 아들의 시간제 중국어 교사로 자기를 데려다 쓰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은 그런 개연성을 뒷받침한다. 그녀는 또 경찰 조사 과정에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쪽 사람이 다치고 저렇게 말하면 저쪽 사람이 다칠 것 같다”라는 식으로 고충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의혹에 대해 태릉골프장측은 극구 부인했다. 그녀를 채용하면서 신원조회를 하지 않았기에 끝까지 신분을 몰랐다는 것이다. 남 아무개 총무부장은 “경기실장이 담당인데 신원조회 없이 캐디 학원에서 이력서와 주민등록증을 붙여온 것을 보고 뽑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녀를 3년여 동안 문순옥으로만 알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또 경기실장이 이미 문순옥씨의 불법 취업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신고자 김상우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김상우씨는 검찰이나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철저히 진상 조사를 할 경우 기꺼이 나가 캐디 강씨와 대질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 3년여 동안 강씨의 신원을 전혀 몰랐다는 태릉골프장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원래 태릉골프장은 직원을 비롯해 캐디에 대해서도 신원조회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 주요 기관장들이 수시로 출입하는 장소의 특성상 경호와 보안 사고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업무는 주로 군 정보기관 출신이 근무하는 경기실이 맡았다. 현재도 캐디 채용과 관리 업무는 기무사 출신이 책임자로 있는 경기실 소관이다.

까다롭던 캐디 신원 조회가 느슨해진 때는 골프를 치지 않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그때부터는 캐디 학원 출신을 채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위장된 신분증을 지닌 불법 체류자인지조차 가리지 않고 3년 이상을 국가 중요 인사들의 지근 거리에 강씨를 내보냈다는 점에서 관리 소홀 책임은 피할 길이 없다. 더구나 최소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군 정보기관이 이를 가려내지 못했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캐디는 라운딩 내내 골프를 치는 사람과 근접 거리에서 골프채를 뽑아주고 거리 측정과 볼 치는 환경 등을 알려주면서 골퍼와 호흡을 함께 하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근거리에서 지켜본 고객의 골프 취향과 매너 등을 골프장측에 작성해 제출하는 것도 캐디의 몫이다. 따라서 골프 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골프 파트너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숨소리까지 다 엿들을 수 있다.

위장 신분으로 3년여 동안 활동한 강명자씨는 캐디 중에서도 고참급에 속한다. 국방부장관과 각군 참모총장, 국정원장, 각부 장관들이 라운딩할 때는 강씨와 같은 고참 캐디가 주로 안내를 맡아왔다. 국가 고위층이 라운딩하는 동안 대화한 내용이 모두 문씨의 눈과 귀를 통해 체크된 것은 분명하다. 이제 그 내용이 어느 누구에게 유출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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