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미워하지 마세요”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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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에이즈 환자 쉼터 단독 취재/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 살아
쉼터 하면 흔히 사람들은 노숙자나 매매춘 여성 쉼터를 떠올린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바로 쉼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널리 알려진 쉼터와 달리 일반인이 잘 상상하지 못하는 쉼터도 있다. 에이즈(AIDS) 환자가 모여 사는 쉼터 같은 곳이 바로 그러하다. 각자 바이러스 병원균을 몸 안에 품고 있는 환자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사저널>은 지난 11월25~26일 이들 에이즈 환자의 쉼터를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12월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앞두고 언론에 최초로 자신들의 공간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는 쉼터 관계자는, 대신 두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지명이나 기타 쉼터가 있는 곳의 소재지를 파악할 만한 단서를 절대 공개하지 말 것. 둘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허락이 없는 한 뒷모습이나 옆모습도 촬영하지 말 것.

현재 에이즈 환자 쉼터는 전국 여섯 군데에 세워져 있다. 주변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환자의 특성상 이들은 연고가 없는 지역의 쉼터를 선호한다. 서울에 살던 환자라면 부산을 택하는 식이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환자는 물론 쉼터 살림을 돕고 있는 가톨릭 사제나 자원봉사자까지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자가 방문한 쉼터에서 2년째 살고 있다는 외국인 신부는 “내 얼굴이 공개되면 이 지역 신도들이 쉼터 위치를 눈치채게 돼 식구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라며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했다(쉼터 사람들은 서로를 ‘식구’라고 부른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방문하게 된 쉼터는 한 지방 도시의 변두리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동네였다. 막 학교를 파한 듯한 초등학생들이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골목길을 따라 가다 보니 담장에 새로 페인트 칠을 한 듯한 산뜻한 2층 양옥이 눈에 띄었다. 일반 가정집과 외관상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이 집이 바로 가톨릭 수도회가 제공한 에이즈 환자의 쉼터였다.
맵고 짠 음식 좋아하고 음주 가무 즐겨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 안에 들어서니 손바닥만하지만 화초가 정갈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에 들어서면서 처음 받은 느낌은 환하고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1,2층 합쳐 50평 남짓 된다는 이 집 곳곳에는 넓은 창이 나 있어 햇살이 넉넉히 투과되고 있었다. 천장도 높아 시원시원했다. 에이즈 환자 쉼터라면 왠지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한 방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것 말고도 기자의 선입견이 깨져 나간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이들이 먹는 음식은 맵고 짰다. 1주일에 나흘씩 이곳에 와 음식 만들기 봉사를 한다는 50대 여성 자원봉사자는 “맵고 짠 음식이 아니면 식구들이 잘 먹으려 하지 않는다”라며, 그래도 지나치면 안되는데 저녁 반찬으로 만든 부침개가 너무 짜게 되었다고 걱정했다. 아픈 사람들이라 싱겁고 미지근한 음식만 먹고 지낼 것이라는 선입견은 이로써 보기 좋게 깨졌다(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는 치료약 부작용으로 속이 울렁거려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다고 했다).

쉼터 사람들이 금욕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이들은 하나 둘씩 정원에 나가 여유롭게 식후 담배를 즐겼다. 정원 구석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보니 디스플러스·던힐 등 담배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반신불수 증세가 와 이 공동체에서 제법 중환자로 분류되는 박기문씨(가명·36세)까지도 식후에는 성한 왼손으로 멋지게 담배를 피워 물곤 했다.

술도 즐겨 마시는 편이었다. 개인적으로 술을 사다 먹는 것은 금지하고 있었지만, 전체 모임이 있을 때면 적당량의 음주를 허용한다고 했다. 기자가 찾아간 날 밤, 마침 쉼터 식구 중 한 사람인 박광서씨(33) 생일 파티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신부님이 직접 사 온 1.6ℓ짜리 페트병 맥주 두 개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감염 사실을 알기 전까지 지방 소도시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김성우씨(가명·33세)가 이 날 오랫만에 기타를 다시 잡고 파티 흥을 돋우었다.
1주일에 한 번 대청소, 식사는 뷔폐식

이처럼 쉼터의 첫인상은 선입견의 배반으로 특징지어졌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평범한 진리를 기자는 여러 번 깨우쳐야 했다.

물론 에이즈 환자 쉼터다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재 이곳 쉼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모두 6명. 성인 남자 4명에 모녀 한 쌍이 있다(이 중 어린이는 환자가 아니다). 에이즈 환자 쉼터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여기에는 HIV 감염자와 에이즈 환자가 함께 섞여 있다. HIV 감염자란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가 몸 안에 침투해 있으되, 면역 수치가 일정한 범위에 있어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쉼터 식구 중 3명은 HIV 감염자여서 겉보기에 건강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비해 나머지 2명은 에이즈 환자이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을 앓고 있는 에이즈 환자는 HIV 감염 후 이미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합병증이 나타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손톱 발톱이 갈라지고 시력이 저하되는가 하면 신체 일부분이 마비되는 등 겉보기에도 이미 심각한 신체 증상을 앓고 있다.

에이즈 환자는 물론 HIV 감염자 또한 에이즈 전파 능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이들은 서로에게 병을 옮길까 봐 늘 조심한다. 이들의 건강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이미영 간호사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여러 종류가 있는 만큼 에이즈 환자끼리도 서로 새로운 병을 옮겨 문제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쉼터는 늘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일반인 같으면 1년에 한 번 하기도 힘들 대청소를 쉼터 식구들은 1주일에 한 번꼴로 해치운다. 밥상도 독특하다. 쉼터 식구들은 반찬을 상 한가운데 늘어놓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싱크대 한켠에 뷔페처럼 차려진 반찬들을 각자 개인 접시에 덜어 먹는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면도칼이나 칫솔은 물론 개인 것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이 면도칼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영주씨(가명·26)의 네 살 난 딸 주희(가명)가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오빠들’ 면도칼을 갖고 놀다 자기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알려진 대로 에이즈는 상처를 통해 감염되기 쉽다. 영주씨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아이를 낳던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라고 영주씨는 말한다.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미혼모가 된 영주씨는 뱃속 아이가 6개월째 들어서야 자신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낙태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 아이 아빠와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대책 없이 아이를 낳고 말았다는 영주씨는, 출산 이후 오히려 더 심한 마음 고생을 했다. 산모의 에이즈가 신생아에게까지 감염되었는지 확인하려면 꼬박 1년 반을 기다리며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에이즈 환자 쉼터에서 그 기간을 지내는 동안 영주씨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다행히 주희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뒤 영주씨는 이곳 쉼터로 자리를 옮겨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주희가 감염되었을까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신 병력이 있는 일부 환자들이 발작을 일으켜 쉼터를 뒤집어놓는 일도 있다. 쉼터 최고령자인 황호규씨(가명·62)는 한쪽 눈이 녹내장이어서 그렇지 전체적인 스타일은 말쑥한 미남자이다. 한때 교사를 지냈기 때문인지 말투도 논리정연하다. 황씨는 기자에게 최근 폐 수술을 받았다며 겨드랑이 밑에 난 수술 자국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본즉 그의 상처는 자기 몸에 못을 박아 생긴 것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그는 “내가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안기부 애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20년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가끔씩 소동을 일으키기는 해도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감염자들만의 공감대가 이곳에는 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다가 퇴사해 자기 사업을 준비하던 중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박기문씨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집보다 이곳이 편하다고 했다.
자원봉사자들을 거칠게 몰아붙이기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환자들과 달리 박씨는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부모님과 누이들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가족이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다 해도, 가족이 혹시나 자신으로 인해 엉뚱한 피해를 보게 될까 봐 집에 있는 동안 그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실명해 가는 두 눈을 감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까이 있는 반찬 그릇이 이미 보이지 않자 이를 알면 연로하신 부모님이 충격을 받을까 봐 박씨는 끼니 때마다 맹물에 밥을 말아 훌훌 들이키기 바빴다고 한다.

쉼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숨김 없이 드러내며 산다. 단, 건강 상태에 따라 감정의 기복 또한 심한 것이 이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일부 환자들은 때로 “비감염자인 네가 뭘 아느냐”라며 자원봉사자들을 거칠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 쉼터를 찾아와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병태씨(가명)에 따르면, 감염자들은 보통 비감염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그러다 보니 만성적인 피해 의식과 더불어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듯한 행태가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감추고 싶은 욕구. 이는 쉼터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쉼터에 1년간 거주하다가 최근 독립한 이주형씨(가명·31)는 “우리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일반인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치료약이 발달하면서 에이즈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완치는 아직 어렵지만 조기에 병을 발견하기만 하면 당뇨병이나 고혈압 환자처럼 꾸준히 약을 먹는 것만으로 평생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기나 물을 통해 에이즈가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 즈음에는 상식이다.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러나 일반의 편견은 여전히 견고하다. 에이즈 환자가 동네 목욕탕이나 찜질방에 드나들었다고 흥분하는 언론을 보면 입맛이 쓰다고 이미영 간호사는 말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에이즈 환자로부터 자녀 양육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정영주씨 같은 사람은 그저 억장이 무너질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에이즈 환자들은 자꾸 움츠러든다.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이를 위해 자신들이 에이즈 감염자임을 커밍아웃하기에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박기문씨는 “에이즈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을 건강할 때는 나도 몰랐다”라고 말했다. 박씨가 더 어이없어 하는 것은, 대기업에 근무했던 만큼 매년 두 차례씩 건강 검진을 꼬박꼬박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씨가 잠복기를 거치는 동안 검사에서는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검사 항목에 에이즈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건강 검진은 당사자가 요청하지 않는 한 에이즈 감염 여부를 검사하지 않는다).

쉼터를 떠나오던 날 박씨는 기자를 보며 “우리를 많이 도와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돕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욕하지 마세요. 미워하지 마세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돕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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