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못 믿는데 내가 너를 믿으랴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12.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검·경, 깊은 불신 속 ‘수사권 싸움’ 2라운드 돌입
“법지식이 풍부한 학계 출신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 “아니다. 원활한 운영을 위해 연장자가 맡거나 공동위원장 체제로 가야 한다.”

지난 12월2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검·경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 첫 회의는 시작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검찰측이 김일수 고려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경찰측이 성유보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위원장 후보로 내세우며 격돌했기 때문이다. 일부 위원들이 격한 말을 내뱉는 가운데 양측의 설전은 1시간30분을 넘겼다.

제비를 뽑아 위원장을 뽑자는 말까지 나오는 가운데 결국 파국을 우려한 성유보 대표가 양보하겠다고 선언해 이 날의 힘겨루기는 검찰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검·경의 샅바 싸움이 만만치 않게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 날 송광수 검찰총장과 최기문 경찰청장이 직접 위촉한 민간 자문위원 12명은 김일수 고려대 교수, 김주덕 변호사, 서경석 전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정웅석 서경대 법대 교수, 황덕남 변호사, 신성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 검찰이 추천한 6명과 성유보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 대표, 서보학 경희대 법대 교수, 조 국 서울대 법대 교수, 김희수 변호사, 오창익 인권시민연대 사무국장, 최영희 내일신문 부회장 등 경찰이 추천한 6명이다. 김회재 대검 수사정책기획단장과 홍영기 경찰청 혁신기획단장은 간사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9월15일부터 논의를 시작한 검·경의 수사권 조정 논의는 애초 ‘늦어야 두 달 정도 갈 것이다’라던 호언과 달리 4개월 가까이 되도록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검찰에서는 문성우 대검 기획조정부장이, 경찰에서는 김홍권 차장이 주체가 되어 각각 5명의 실무위원이 논의를 진행했는데,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 사안을 보는 시각차가 컸기 때문이다. 자문위원회가 출범한 것도 완충 지대가 필요하다는 양측의 이해 관계에 따른 측면이 있다.

신사협정 맺고 진지하게 논의했으나…

한 경찰 관계자는 “검찰은 경찰의 능력을 불신하며 ‘동등한 기관’보다는 ‘지휘를 받는 하급 기관’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도 지지 않았다. 그는 “경찰은 입만 열면 검찰에 예속되어 있다고 하는데 인사·조직·예산이 독립된 조직이 어떻게 예속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반박했다.

경찰은 또 지난 9월 검찰이 전과 달리 ‘수사권을 조정하자’며 공격적으로 나올 때부터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해왔다. 청와대가 나설 조짐이 보이자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전에는 경찰이 문제를 제기하고 검찰은 방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반면 검찰은 경찰이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앞세워 수사권 독립을 기정사실화한다고 의심한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검·경이 사사건건 반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선 지난 9월 논의를 시작할 때 신사협정을 맺었다. 힘겨루기가 아닌 진지한 논의를 통해 접점을 찾아보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회의가 끝나면 바로 자료를 회수하고 논의 내용을 철저히 보안에 부쳤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내용상으로도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거리를 상당히 좁혔다. 우선 검사의 승인이 있어야 긴급 체포한 사람을 풀어줄 수 있던 것을 경찰의 판단에 맡기는 쪽으로 의견 접근이 이루어졌다. 서울 지역 경찰관이 다른 지역에 가서 수사할 때 해당 지역 검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제도도 없애자는 데 큰 이견이 없었다. 제도화되어 있지만 실효성이 없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고소 사건과 관련해 송치 시기까지 검사의 지휘를 받는 문제도 경찰 재량에 맡기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검찰 관계자는 “기관 이기주의로 풀어갈 문제가 아니다. 좋은 안이 나와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체계가 되면 좋은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검찰도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찰 관계자도 “검·경이 주어가 아닌 ‘국민’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소송법 제195조와 제196조에 접어들면 양측은 한치의 양보도 없다. 형사소송법 제195조는 ‘검사는 범죄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범죄 사실과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라고, 형사소송법 제196조 1항은 ‘수사관·경무관·총경·경감·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수사는 경찰이, 공소는 검찰이’ 하기를 원하고 있다. 수사 주체가 검사가 아니라 검·경이라는 점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 문제가 조정되지 않는다면 무슨 수사권 조정이냐”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현재 경찰 내에서는 ‘검찰의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깨고 나오라’는 의견과 ‘합의된 성과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가자’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청와대가 물밑 조정에 나설 때 됐다”

검찰은 펄쩍 뛴다. 검찰 관계자는 “그것은 경찰이 치안과 사정을 다 가져가겠으니 검찰은 기소만 하라는 것이다 ‘경찰 권력’이 상상 못할 정도로 커질 수 있다. 국민에게도 좋지 않다”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두 차례 회의를 한 자문위원회는 1월 중 집중적으로 논의해 결론을 내릴 계획이다. 최기문 경찰청장이 3월, 송광수 검찰총장이 4월에 임기가 끝나는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자문위원은 “국민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양 기관 관계자들이 말하고는 있지만 자문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말 그대로 ‘자문’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양 기관의 갈등이 첨예화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각에서 청와대가 물밑 조정에 나설 때가 되었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