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에 새긴 민초들의 기개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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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국내에 몇 안되는 항일 전적 비석…사료 가치 높아
불행 중 다행이다. 약탈당했지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선조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공을 기록한 대부분의 문화재가 일제 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11월 각 도 경찰부장에게 ‘반 시국적 고적’을 철거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항일·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문화재를 모두 없애라는 야만적인 지시였다.

맨 먼저 1380년 고려 장군 이성계가 지리산 부근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전북 남원의 ‘황산대첩비’가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 사명대사의 ‘석장비’,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있던 사명대사 ‘기적비’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와 ‘좌수영대첩비’도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히 ‘명량대첩비’ ‘좌수영대첩비’는 광복 이후 경복궁 땅 밑에서 발견되었다.

북관대첩비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 선조들의 혼이 담겨 있는 몇 안되는 귀한 문화재이다. 1천5백자로 된 비문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적을 무찌른 용맹스런 이야기는 명성이 높다. 이순신·권 율 등의 승리를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십인, 오인의 궐기이다. … 의병들은 정문부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피를 나눠 마시며 의를 맹세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 의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나야말로 맨 처음 쳐들어 간다’라며 적을 공격했다. 무수한 적병을 자르고 수많은 병마나 무기를 노획했다. 승전보가 알려지면서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여드니 그 수가 7천명에 달했다. … 마침내 적이 퇴각하고 재차 함경북도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 (정문부의 활약상을 보고받은) 왕은 눈물을 흘렸다. …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우러러보고 위업을 칭찬하고 있다. 관북에서 의병의 공적은 대단히 훌륭하였다. … 이들의 공적을 후세에 남기니 영원 무궁토록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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