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심판대 오른 ‘테러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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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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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면위, “미국이 인권 상황 악화시켰다” 비판
‘인권의 보루’ 미국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 인권 기구에 의해 ‘인권 침해의 장본인’으로 고발당했다. 미국이 ‘더 많은 안전’을 외치며 벌여온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전세계에 안전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세계 도처에 불안을 증폭시키며 인권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인터내셔널)가 지난 5월28일 펴낸 <국제사면위원회 보고 2003>에 실렸다. 세계 1백51개국의 인권 상황을 정리해 펴내는 이 기구 이렌느 칸 사무총장은 보고서를 배포하기 앞서 미국 정부가 행여 이 보고서에 대해 모른 척하지 않을까 싶어, 따로 기자 회견까지 열었다. 칸 사무총장은 (미국 정부가 그토록 원해온) 안전은 나라의 안전뿐 아니라 시민의 안전까지를 포괄할 수 있게 폭넓게 재정의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미국이 지금과 같이 좁은 ‘안전 아젠다’를 고집하면 국제 인권운동가들의 도전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를 보낸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아시아·아프리카·중동 등 지역을 불문하고 전세계의 인권 보장 전선에 끼친 영향은 ‘최악’이었다. 먼저 아프리카. 지난 한 해 이 지역은 특히 콩고민주공화국·코트디브와르·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일부 분쟁 국가에서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살인·사지 절단·납치·고문이 끊이지 않아 인권 상황이 크게 악화했다. 예컨대 콩고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 사이 직접적인 폭력의 결과로 최소한 5천 명이 희생되었다(이라크 전쟁에서 발생한 미·영 합동군 전사자 수는 모두 2백 명을 넘지 않는다). 전세계의 눈길이 테러와의 전쟁에 쏠린 틈을 타 더 많은 폭력 행위와 인권 유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아시아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보고서는 테러와의 전쟁 1차 대상이 되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인권 침해와 무력 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체 지역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자유 아체 운동’을 둘러싼 충돌 과정에서, 지난해에만 민간인 1천3백명이 목숨을 잃는 등 ‘인권 재난’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같은 재난도 1년 내내 초점이 되었던 테러와의 전쟁에 파묻혀 잊혔다. 같은 기간, 인도네시아에서는 미국인·호주인을 겨냥한 ‘발리 폭탄 테러’가 1년 내내 뉴스의 중심이었다.

중동 지역은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행동으로 이어졌던 현장. 하지만 국제사면위원회는 이 지역이야말로 ‘전쟁의 그림자’(조사 시점에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로 인해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유달리 인권 상황이 악화한 곳으로 지목했다. 이라크에 대한 무기 사찰과 사담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는 문제가 중동 최대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스라엘 샤론 정권이 저지른 광범위한 인권 침해 행위는 국제 인권 무대에서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의 고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지난해 전세계 인권 기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국제형사법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보편적 정의의 메커니즘을 훼손’했다. 미국은 또 이같은 과정을 통해 주요 인권 국가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도덕적 권위도 스스로 훼손했다는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따끔한 일침에 대해 미국은 일방주의식 반응으로 일관했다. 에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특히 관타나모 포로 문제 등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 내용이 정례 브리핑 시간에 도마에 오르자 ‘일고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 정부는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이라크에서 의도치 않은 인권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라는 질문에도 침묵했다.

미국 정부가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기구로부터 인권 비판의 집중 표적이 된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미국은 지난 1월 자국의 인권단체인 ‘인권 감시’(휴먼라이트워치)로부터도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대표적인 인권 국가임을 자부하는 미국은 지난 3월 인권단체들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전세계 인권 상황을 제 입맛에 따라 재단한 미국 정부판 ‘인권 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미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영원 불변할 것 같던 인권의 개념까지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미국의 역사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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