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종말 멀지 않았다?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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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뉴엘 토드, ‘유로화 득세→달러 헤게모니 붕괴→제국의 몰락’ 예언
프랑스에서는 ‘미국 제국’의 종말을 예언하는 책 <아메리카 이후>가 화제가 되고 있다. 역사학자 엠마뉴엘 토드가 지난해 가을 ‘아메리카 시스템 붕괴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아 출간한 이 책은 몇 달째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벌써 열한 개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은 전세계에 단일 패권국으로 간주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흔히 소련이 무너진 후 미국이 단일 패권국으로 남게 되었고, 아무도 그 막강한 미국의 패권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도 소련이 사라진 후 내리막길을 걸어 왔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처럼 저항할 능력이 없는 나라들만 골라서 공격해온 미국의 모습은 미국의 약점을 말해줄 뿐, 미국의 단일 패권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 최근 보여주고 있는 무력 시위는 유럽과 일본·러시아를 뭉치게 하는 역효과만 냈다고 지은이는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의지만 있다면 군사력에서도 15년 안에 미국과 맞설 수 있다.

토드는 일찍이 1976년 소련과 동유럽 붕괴를 예언한 책을 펴내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한 세대를 앞서 보는 역사가의 통찰이 이번에도 들어맞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토드의 주장 가운데 특히 눈길이 집중되는 부분은, 미국 패권의 운명을 달러와 유로 통화 그리고 석유 자원의 ‘삼각 관계’로 풀이한 대목이다.

토드는 ‘산유국들이 유로 통화를 결제 수단으로 택하면서 미국이 패권 유지 수단으로 악용한 달러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있다. 반테러 전쟁은, 이미 사라진 달러 헤게모니를 방어하는 전쟁이다’라며 ‘부시 정부가 무력 시위를 그만두지 않으면 전세계는 곧 미국의 몰락을 보게 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달러 헤게모니 붕괴’ 이론은 미국 언론에서는 국가 기밀이라도 되는 듯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 주제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첫째, ‘석유 자원을 사고 파는 통화’로서 달러가 갖는 의미에 관해서다. 달러는 브레튼우즈 체제에 따라 금과 바꿀 수 있는 실물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1971년에 깨졌다. 미국은 이때부터 달러 가치에 해당하는 금이 없어도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금과 교환되지 않는 달러가 그 후에도 계속 ‘기축 통화’ 구실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미국의 경제력은 당시에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달러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러를 기축 통화로 유지한 결정적인 사건은 1973년 오일 쇼크였다. 미국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조약을 맺어 석유 결제 수단을 달러로 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미국은 그 대가로 산유국 카르텔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인정해 주었다. 그때 석유수출국기구가 내세운 고유가 정책으로 타격을 받은 쪽은 유럽과 일본 그리고 한국 같은 신흥 공업국들이었다. 석유 자원이 없는 나라들은 원유를 수입하는 데 필요한 달러를 구하기 위해 미국에 수출을 해야 한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서 수입 상품 대금으로 지불한다.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은 원유를 판매해 얻은 막대한 수익을 미국 단기 채권이나 증권·부동산에 투자했다. 결국 미국은 달러만 찍어내면서 수입 상품을 소비하고, 해외로부터 자본 유입도 즐기는 ‘꿩 먹고 알 먹는’ 팔자가 된 것이다. 달러를 석유 결제 수단으로 확립한 덕분에 미국이 누린 이점은, 해외 투자는 물론 통화 조작·환투기 등에까지 미쳤다. 그 실상은 1997년 아시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남미 대륙을 휩쓴 금융 위기 때 생생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봄, ‘악의 축’ 가운데 하나인 이란 외무장관은 유럽연합 외교위원회 대표에게 ‘앞으로는 석유 수출 결제 수단을 대부분 유로 통화로 바꾸겠다’고 통고했다. <슈피겔>은 이 사실을 전하면서, 이란이 결제 수단 전환을 통해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동에서 ‘달러권’ 이탈을 처음 선언한 나라는 이라크다. 이라크는 2000년부터 석유 수출 결제 통화를 모두 유로화로 바꾸었다. 미국에 가장 심각한 일은 석유수출국기구 내부가 이미 유럽 통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시 정부 내 강경파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테러 지원 적성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달러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중동 바깥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세계 4위 석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제3 세계 열세 나라로부터 석유 대금을 현물로 받고 있다. 차베스 정권을 뒤집으려는 쿠데타 배후에 달러가 숨어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2001년 11월, 중국 총리는 외환 보유고 2천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을 유로 통화로 바꾸겠다고 독일 정부에 알린 바 있다. 이란과 중국의 계획이 실현되면 유로 통화는 출범 3년 만에 달러권을 잠식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달러의 지배력이 흔들리는 근본 원인은 미국 경제가 산업 경쟁력을 잃은 소비 구조, 전쟁 구조로 바뀐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천문학적인 규모로 쌓여 가는 무역 적자· 재정 적자·군비 예산이 이를 상징한다. 이것은 역으로 미국의 ‘달러 지배력’이 낳은 부작용이기도 하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한 ‘예방 전쟁’이 사실은 이라크·이란·사우디아라비아가 달러권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라는 토드의 분석은 바로 이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경제력에서도 곧 미국을 앞서게 될 유럽연합과 공존하라. G8 회의에서 유로 통화와 아시아권 통화를 인정하라.’ 토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국 정부에 대해 이렇게 소리쳤다. 또 그는 ‘세계가 기다리는 것은 미국의 몰락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회복된 미국’이라고 덧붙였다. 달러가 세계를 주도한다는 단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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