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무너지는 일본 기업들
  • 채명석 ()
  • 승인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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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들, 잘못 감추려다 경영 위기 자초
일본 기업들의 고질적인 숨기기 체질이 일본 국내외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타이어 제조회사인 브리지스톤이 미국 현지 법인인 브리지스톤 파이어스톤의 리콜 소동으로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 브리지스톤의 매출액에서 약 40%를 차지하는 미국 파이어스톤은 지난 8월 자사가 제조한 타이어 세 종류 6백50만 개를 리콜한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미국 포드 자동차의 대중 스포츠 카인 익스플로러가 주행중 뒤집히는 사고를 일으켜 탑승자가 사망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고발이 미국 고속도로안전국에 접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고속도로안전국은 이같은 고발을 접수하고 약 1천5백만 개가 포드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파이어스톤제 타이어를 조사한 결과, 자동차가 고속으로 주행할 경우 타이어 표면이 파열해 옆으로 뒤집히는 사고를 일으키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속도로안전국은 또 파이어스톤 타이어 파열 사고로 지금까지 88명이 사망했으며, 부상 사고도 약 2천2백 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파이어스톤은 이같은 조사 결과에 따라 지난 8월 초 타이어 6백50만 개를 리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리콜 사상 두 번째 규모인 파이어스톤의 대규모 리콜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연방 상·하원이 이 사건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면서 파이어스톤 내부의 여러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우선 공청회를 통해 파이어스톤이 자사 제품에 대한 고객 클레임을 이전부터 숨겨 왔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예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타이어에 대한 고객 클레임이 접수된 것은 1992년께부터였다. 그 후 1995년부터 클레임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해 1999년 정점에 달했으나, 파이어스톤측은 상·하원 공청회가 시작된 금년 9월까지 이같은 사실을 전혀 공표하지 않았다.
미국 파이어스톤의 모기업인 일본 브리지스톤은 이같은 사실이 불거지자 현지 법인 경영은 현지 경영자에게 일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타이어 파열 사고가 일어난 것은 미국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태국·말레이시아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 파이어스톤은 포드 자동차와 함께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 브리지스톤 경영자들의 위기 관리 의식은 큰 문제이다. 예컨대 공청회가 시작되자 포드 자동차는 사원을 5백여 명이나 동원해 ‘이번 사건의 원인은 자동차의 구조적인 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이어에 있다’는 점을 널리 선전했다. 공청회에서도 포드 자동차는 사장이 직접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파이어스톤 타이어에 문제가 있음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반면 파이어스톤측은 일본인 사장이 공청회에 출석했으나, 질문에 대해서는 미국인 중역에게 답변을 대신하게 하면서 일본식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결과 <유에스 투데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7%가 파이어스톤 타이어에 불신감을 표명하면서, 앞으로 이 회사의 타이어를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브리지스톤은 세계화 전략을 전개하기 위한 거점으로 1988년 경영 위기에 처한 미국 파이어스톤을 매수했다. 브리지스톤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 23개국에 진출해 현재 각국에서 공장 4백65개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화 전략의 거점인 파이어스톤의 경영도 순조로워 지난해 브리지스톤 전체 매출액의 41.4%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 파이어스톤의 리콜 소동은 모기업 브리지스톤의 숨통을 일거에 끊어버릴지도 모를 비수로 변해 가고 있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지난 9월 중순 브리지스톤의 장기 채무 평가를 A₂에서 투자 적격 최하위 등급인 Baa로 하향 조정했다. 파이어스톤의 리콜 비용이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어 거액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그 결과 브리지스톤의 주가는 900 엔대로 곤두박질했다. 미국 현지 법인의 리콜 문제가 불거지기 전 이 회사의 주가가 2500 엔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회사에 대한 일반 투자자들의 장래 평가가 얼마나 비관적인지 알 수 있다. 전문가들도 이 회사의 세계화 전략은 파이어스톤에서 시작해 파이어스톤에서 끝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일본 기업의 내부 은폐 체질이 해외에서 문제가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의 대형 시중 은행인 다이와 은행은 5년 전 미국에서 사취·중죄 은닉 등 스물네 가지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이 은행 뉴욕지점의 일본인 행원이 11년간 은행 몰래 장외 채권 거래를 하다가 11억 달러 손실을 입힌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이같은 사실을 쉬쉬하고 있다가 두 달 후에야 거액 손실 사고를 공표했다. 미국 금융 당국은 이에 대한 제재 조처로 다이와 은행의 미국 영업을 즉각 금지시켰다. 미국의 사법 당국은 다이와 은행에 대해 벌금 3억4천만 달러를 부과했다.
악질적인 내부 은폐 기업 명단에 최근 명문 전기제품 제조업체인 산요(三洋)전기도 이름을 내밀었다. 산요전기 곤도 사다오(近藤定男) 사장은 지난 9월24일 계열 회사가 출력이 부족한 태양열 발전 시스템을 판매한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했다.

그러나 곤도 사장이 사임한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산요전기의 계열 회사가 출력이 부족한 태양열 발전 시스템을 판매한 것은 2년 전 일이다. 이같은 사실은 계열 회사 사원이 곤도 사장과 시민단체, 통산성 등에 고발 문서를 우송함에 따라 드러났다.

그런데도 곤도 사장은 지난 9월 통산성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사실무근이라는 답변서를 보냈다. 그 후에도 기자회견 때마다 계열 회사가 불량품을 판매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곤도 사장이 내부 고발이 있었던 2년 전 이미 고발 내용을 담당 책임자에게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사인 산요전기의 사고 은폐 사실도 발각되었다. 회사가 제조한 가정용 대형 냉장고의 문짝이 떨어져 12명이 다친 사고가 일어났으나, 이같은 사실을 산요전기는 4년간 숨겨 왔다.

기업들의 불상사가 꼬리를 물자 도쿄상공회의소가 지난 7월 발간한 <기업을 위기에서 지키는 크라이시스 코뮤니케이션>이라는 책이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사실을 사실대로 공표하는 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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