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모리 총리의 불안한 ‘구원 등판’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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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모리 내각 출범… 중의원 조기 총선거에 정권 운명 달려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면 와세다(早稻田) 대학 웅변회를 나와야 한다.”

이것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와세다 대학 웅변회 출신인 모리 요시로(森喜郞) 자민당 간사장이 후임 총리로 지명되자 일본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농담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올해로 창립 99년째를 맞고 있는 와세다 대학 웅변회가 모리 총리를 포함해 총리를 4명이나 배출했기 때문이다.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1987년 11월∼1989년 6월)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1989년 8월∼1991년 11월) 그리고 뇌경색으로 쓰러진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가 와세다 대학 웅변회를 나왔다.

와세다 웅변회 출신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렇게 본다면 ‘총리 그릇’이 못된다는 혹평을 듣고 있던 모리가 비상 시국이라고는 하지만 쟁쟁한 라이벌들을 따돌리고 제85대 총리에 지명된 것은, 자민당 각 파벌에 포진하고 있는 와세다 대학 출신과 웅변회 출신 들의 지지에 힘 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오키 관방장관이 웅변회 1년 후배인 모리를 오부치 총리의 후계자로 적극 천거했다고 알려져 있다.
‘와세다 대학 웅변회’에 이어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어휘도 모리가 갑자기 총리에 지명된 궁금증을 풀어주는 또 다른 열쇠이다.

자민당 집행부는 오부치 총리가 의식 불명이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후임 총리 인선에 들어갔다. 한 참석자는 오부치 내각이 추진해 온 경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서 경제통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성 장관을 다시 총리로 지명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야자와 장관이 올해 여든 살이어서 격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미야자와 총리 재기용’ 주장은 쑥 들어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총리 후보로 거론된 사람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무장관이다. 7월에 오키나와 주요국(G8) 정상 회담을 앞두고 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도 정상 회담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외교에 밝은 고노가 적임자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고노 총리’론도 파벌 역학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노 파벌은 현재 중의원 의원 17명으로 이루어진 군소 파벌이다. 최대 파벌 오부치파가 고노파와 손잡고 ‘고노 정권’을 탄생시킨다 해도 파벌 세력이 1백20명에 불과해 자민당 전체 세력(3백74명)의 과반수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오부치파는 정국의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고노파보다 당내 제3위 파벌인 모리파와 손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모리를 총리로 밀게 된 것이다.모리가 오부치 정권의 안정을 위해 멸사봉공해 왔다는 사실도 크게 참작되었다. 그는 재작년 오부치 정권이 탄생할 때 오부치 편이 아니었다. 모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오부치 후보를 밀지 않고 파벌 후배인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郞) 전 후생장관을 밀었으나, 오부치 정권을 떠받쳐온 가토 고이치(加藤一) 간사장이 사임한 뒤 자기가 간사장에 임명되자 친 오부치로 급선회했다.

간사장 시절 모리는 ‘오부치 정권에 대한 멸사봉공이 나의 신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오부치 총리가 비록 와세다 웅변회 2년 후배이지만 오부치 정권을 지지해야 ‘오부치 이후’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래서 오부치 총재 재선을 제일 먼저 지지하고 나선 것도 바로 모리였다.

일본 언론들은 모리의 그런 행적이 ‘오부치 이후’의 유력한 후보였던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이나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정조회장을 제치고 그가 오부치 총리의 후계자로 지명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분석하고 있다.

모리 총리는 취임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쟁이 끝나고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온 부친으로부터 ‘멸사봉공’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에 새겼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세간에는 모리 총리가 멸사봉공과는 거리가 먼 정치가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서 모리 총리가 멸사봉공해 온 대상은 국민이 아니고 정치적 입지나 정치 헌금이었다는 비난이다.

우선 그가 리크루트 사건과 사가와 규빈 사건 등에 연루된 ‘회색 정치가’라는 점이 입방아에 오른다. 모리 총리 본인은 지금도 그 사건들과 관련이 없다고 부정하지만, 1988년 리크루트 관련 회사의 비공개 주식을 양수해 매각한 사실이 드러나 스스로 제2차 가이후 내각의 각료 입각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 영향으로 아베파의 후계자 경쟁 때 자신보다 당선 횟수가 적은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에게 파벌 회장 자리를 추월당했다.

그밖에도 1992년 사가와 그룹으로부터 떳떳치 못한 정치 헌금을 받았던 사실이 드러났고, 석유 도매상이 관련된 정치 헌금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명단에 이름이 공표되었다. 재작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 오부치 후보의 대항마로 파벌 회장인 모리가 입후보를 사퇴하고 후배인 고이즈미 전 후생장관(현 모리파 회장)을 입후보시킨 것도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이미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모리 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또 있다. 그는 와세다 대학 웅변회 출신답지 않게 실언을 자주 하는 정치가이다. “오사카 사람들은 돈 벌기에 급급해 공공 도덕이나 선거에 관심이 없다.”(1988년) “요코하마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군사 행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다.”(1992년·58쪽 상자 기사 참조) “오키나와의 교직원조합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어 무엇이든 정부에 반대한다. 오키나와의 두 신문도 마찬가지이다.”(2000년 3월)

같은 와세다 대학 웅변회 출신인 오부치 전 총리가 재임중 ‘눌변’으로 애를 먹었다면, 모리 신임 총리는 ‘실언’으로 실책을 범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모리 총리에 대한 민주당의 평가는 시중의 평가보다 훨씬 매섭다. “모리 총리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이 없는 사람이다.” “오부치 총리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진공(眞空) 총리’라는 평을 들었지만, 모리 총리야말로 공중을 헤매는 ‘공중(空中) 총리’이다.” 일본 공산당 후와 데쓰죠(不破哲三) 위원장도 모리 총리를 흉폭한 발언으로 설화를 잘 입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면서, “총리가 된 후에도 그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정책을 말하기 이전에 실격이다”라고 평했다.

2년 전 오부치 총리를 ‘식어빠진 피자’라고 야유한 외국 언론들의 평가도 엇비슷하다. <뉴욕 타임스>는 모리 총리를 ‘벼룩 심장을 갖고 있는 코끼리’에 비유하면서, 거구에 비해 결단력이 없는 정치가라고 혹평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모리 총리를 ‘수구파 정치가’라고 단정했다.“오부치 정권 정책 계승하겠다”

그러나 수구파 정치가이든 공중 총리이든 긴급 피난 형태로 추대된 모리 총리는 할 일이 많다.

모리 총리는 4월7일 국회에서 행한 소신 표명 연설에서 일본 경제의 신생과 대담한 구조 개혁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내각을 ‘일본 신생 내각’이라고 명명하고, 앞으로 지향할 국가상으로 △국민이 안정감과 꿈을 갖고 생활하는 국가 △정신이 풍요한 아름다운 국가 △세계로부터 신뢰받는 국가를 제시했다. 또 정책 면에서는 오부치 정권의 정책을 계승하며, 교육 개혁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적극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 웅변회 출신 선배 총리들이 단명으로 끝난 것처럼 모리 총리 역시 자신의 소신과 정치적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단명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유는 올해 안에 치러야 할 중의원 총선거.

오부치 총리가 건재했을 때만 해도 야당의 조기 해산·조기 총선거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의 대세는 오키나와 주요국 정상회담이 끝나는 7월 이후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가 급작스레 하차하자 정상 회담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빠르면 5월 초순에 치러질지도 모를 총선거에서 만약 자민당이 승리한다면 모리 정권은 본격적인 정권으로 승격할 것이며, 만약 패할 경우 단명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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