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발 ‘금융 쿠데타’ 내막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2000.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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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드레스덴 은행 합병… 해외 자본 공세에 맞선 방어책
독일을 상징하는 기업을 꼽으라면 대개는 벤츠 자동차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자동차 업체를 비롯해서 세계 유수의 독일 기업에 거미줄 같은 손길을 뻗치고 독일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실세’는 따로 있다. 바로 독일의 각 산업, 거의 모든 대기업에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 그리고 이 은행의 대주주인 보험기업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3월9일 독일의 두 은행 회장이 공개한 합병 계획에 독일은 물론 유럽 금융가가 술렁이고 있다.

합병에 참가하는 은행은 독일에서 서열 1위와 3위인 독일 은행과 드레스덴 은행이다. 두 은행의 자산을 합하면 무려 1조2천억 달러에 달한다. 그 결과 세계 최대 규모의 은행이 독일에서 떠오르게 된다. 이 은행이 ‘독일-자문 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여는 시점은 내년 1월. 합병 준비 작업은 올 여름에 시작되어 11월에 두 은행이 합동 주주 총회를 열면 일단락된다.

독일의 한 유력한 일간지는 이 합병 계획을 분석한 특집 기사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제목을 달았다. 프랑크푸르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두 은행의 합병을 쿠데타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쿠데타를 꾸미는 막후 세력에게는 비밀 유지가 철칙이다. 두 은행의 합병 또한 쥐도 새도 모르게 준비된 것일까?

합병설이 처음 떠돈 시점은 지난해 가을이다. 그러나 당시 드레스덴 은행이 적극 나서서 진행한 막후 협상은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드레스덴 은행은 그후 합병 상대를 바꾸었다. 새로운 파트너로 떠오른 상대는 독일에서 서열 2위인 ‘저당-연합 은행’. 드레스덴 은행은 최근까지도 이 두 번째 상대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슈피겔> 최근호는‘저당-연합 은행’이 지역 은행으로 남기를 고집하는 바람에 이 협상이 중단되었고,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던 독일·드레스덴 두 은행 총수의 협상이 그 후 물밑에서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무장한 리무진을 손수 몰면서까지 비밀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일명 ‘알파-델타 작전’이라 불린 비밀 협상의 뚜껑이 열리자 두 은행의 중역들마저 놀랐다.

독일이 드레스덴을 먹었다?

이번 쿠데타의 주역으로는 단연 두 은행의 총수가 꼽힌다. 이들은 합병 이후 3년 동안을 과도기로 삼아 공동 대표로 일한다고 밝혀 ‘공조 체제’를 과시했다. 그러나 두 은행의 자산 비율은 70 대 30이다. 따라서 아무리 공조 체제를 내세운다 해도 사실은 독일 은행이 드레스덴 은행을 ‘집어삼킨’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새로 출범하는 은행 이름에 ‘독일’만 남고 ‘드레스덴’은 볼 수 없는 이유가 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레스덴 은행의 최대 주주는 유럽 보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알리안츠 보험’이다. 드레스덴 은행에 20%가 넘는 지분을 갖고 있는 알리안츠가 도장을 찍지 않았다면 두 은행의 합병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경제 분석가들은 이번 합병 협상에 숨은 또 하나의 주역으로 아이셀 독일 재무장관을 꼽는다. 그가 내놓은 세법 개정안에 따르면, 은행이나 보험사는 합병 과정에서 얻게 되는 수익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받게 된다. 예를 들어 알리안츠 보험은 드레스덴 은행 지분을 독일 은행에 매각하고 받은 자금에 대해서 과거 콜 정부 때라면 50% 소득세를 내야 했다. 슈뢰더 정부는 바로 이 세금을 면제하는 쪽으로 세법을 바꾸려 하는데, 그 결과 기업 합병을 재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대기업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는, 그래서 보수적인 콜 정권이 16년 동안 넘보지 못한 일을 슈뢰더 사민당 정부가 집권 1년 반도 못되어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유럽 금융가에는 독일 은행을 비롯해 몇몇 핵심 은행을 인수하려는 해외 자본의 공세가 치열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홍콩상하이 은행이 독일 은행을 인수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독일의 간판급 은행들은 해외 자본의 손아귀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을 맞아 대책을 세워야 했다. 독일 은행의 이번 합병은 일종의 ‘자기 몸 불리기’를 통한 방어책인 셈이다.

독일의 은행들이 외국 자본의 인수 공세에 시달리게 된 이유로는, 먼저 독일 은행들이 해외 은행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수익률이 낮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때문에 은행의 주가 또한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어 외국 자본의 인수 공세에 취약해진 것이다. 독일 은행의 수익률이 낮은 것은 ‘문어발식 경영’이 주된 요인이다. 은행 하나가 영세민 예금 유치에서부터 대기업 투자 사업까지 잡다하게 취급하고 있어 전문성이 없고, 고수익 분야를 개발하는 능력도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독일의 은행·보험사는 각 기업의 지분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점 역시 기업의 ‘투명 경영’을 가로막아 은행의 수익을 떨어뜨리고 있다. 독일 은행이 일반 시민 예금을 취급하는 ‘은행 24’를 새로 만들고 이 은행의 지분을 알리안츠 보험에 넘긴 것은 앞서 지적한 약점을 없애려는 한 가지 시도이기도 하다. 수익률이 낮은 분야를 버리고 대기업 투자와 같은 고수익 분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반면 알리안츠는 드레스덴 은행을 독일 은행에 넘기는 대가로 ‘은행 24’의 지분 49%를 얻게 된다. 알리안츠는 ‘은행 24’의 전국 지점망을 이용해 무려 천만 명 가까운 고객을 확보하게 된다. 각종 보험 상품의 판로가 은행 점포를 통해 열리게 된 것이다. 또 드레스덴 은행과 같은 대규모 은행과의 연계를 끊으면 흔히 독일 주식회사의 후진성을 말해주는 은행·보험·기업의 ‘3각 유착 구조’를 혁신할 수 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독일·드레스덴 은행의 합병 전략에는 유럽 금융 시장에서 패권을 확보한다는 공세적인 측면도 있는데, 그 내용은 유럽 금융 자본의 판도를 읽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럽 각국에서 1980년대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기업 합병은 1990년대 말부터 금융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유럽연합의 시장 통합이라는 조류 속에서 각국의 기업이 선택한 전략이며, 해외 자본과의 경쟁에 대비해 국내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의 은행 합병은 유럽의 화폐 통합과 맥을 같이해서 단계적인 변화를 보여 주었는데, 예를 들어 한 나라의 2∼5개 지역 은행이 전국 단위 은행을 구성한 후에는 흔히 외국의 소규모 은행을 인수한다.

앞으로는 주로 각국의 대규모 은행 간에 합병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독일·드레스덴 은행의 합병은 바로 이런 추세에 대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한데, 독일 은행의 브로이어 회장은 ‘두 은행이 협조하여 유럽의 파워 하우스를 세운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지구 차원의 금융 합병에 대비해서 유럽에 근거지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는 합병으로 생기는 수익 약 3백30억 달러가 앞으로의 경제 전쟁에 충분한 탄약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투자 업무 위험도 높고 실업 문제 남아 앞날 불투명

그러나 독일·드레스덴 은행의 합병 계획이 장밋빛 미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슈뢰더 총리는 이번 합병에 대해 “우리가 막을 수 없고 막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했는데, 합병후 독일 은행은 통제할 수 없는 경제 권력이 될지도 모른다. 독일 역사학자 치콘은 1929년 대공황을 앞두고 독일 은행과 어음 할인 은행이 합병한 전례를 들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을 위협할 만한 새로운 권력이 떠오르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 미국에서 그랬듯이 큰 은행끼리의 합병 중 성공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독일 은행이 고수익을 기대하고 있는 투자 업무에 위험도가 높다는 점도 문제다. 그리고 기업 합병에 으레 따르는 실업 문제도 남아 있다. 합병 계획에 따르면 은행 지점 2천4백개 중 8백개가 문을 닫고 두 은행 직원 14만 명 중 당장 1만6천명이 정리 해고 대상이다. 슈뢰더는 은행측에 “대량 해고만은 피해야 한다”라고 전했고 은행측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고 방지 조항을 노사 협약에 넣자는 노조의 요구를 은행측은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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