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민지’ 벗어난 파나마의 어두운 미래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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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철수 뒤에도 ‘재개입 권리’ 인정…생태계 파괴 후유증도 심각
“새벽 6시, 무혈 봉기 성공, 저항군 체포, 금일 저녁 새 정부 수립 완료.” 20세기 말 아프리카의 내전 지역 어디에선가 흘러나왔음직한 이 메시지는 1903년 11월3일, 파나마의 미국 영사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띄운 전문이다. 그보다 두 해 전인 1901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루스벨트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파나마 운하가 필수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파나마가 속해 있던 콜롬비아가 미국의 운하 건설을 거부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를 분리, 독립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때의 ‘파나마 독립’ 전략에 대해서 루스벨트는 퇴임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 외교의 전통에 따라 (파나마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면 의회에 2백 쪽은 족히 되는 문서를 제출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의회에서는 이 문서를 둘러싸고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미국의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파나마의 ‘무혈 봉기’. 그 열흘 뒤에 ‘신생 공화국 파나마’의 수반은 루스벨트를 찾아가 국가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런 선언문을 읽었다. ‘아메리카 민족의 어머니,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이 어린 자식을 쓰다듬을 때 당신은 아메리카 민족을 교화하고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사명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닷새 뒤, 두 나라는 ‘파나마 운하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이 조약에 따라 파나마 운하 건설뿐만 아니라 ‘운하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군대 주둔권을 얻었고, 파나마 내정에 불안 요소가 생기면 미군을 투입한다는 합의까지 받아냈다. 수백 년 동안 스페인과 콜롬비아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국이 된 파나마는 이렇게 해서 미국의 식민지로 굴러떨어졌다.

미국, 파나마에서 남미 장교 5만명 배출

미국이 파나마 운하 건설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세계 정치의 패권 이동을 알리는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파나마 운하에 처음으로 눈독을 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이미 1878년에 콜롬비아와 협상을 벌여 운하 건설권을 따냈다. 그러나 운하 건설을 맡은 업체가 10년이 못가 파산하고 여기에 프랑스 정계가 얽힌 뇌물 사건까지 터졌다. 당시 운하 건설을 맡은 프랑스 업체에는 수많은 소시민과 연금생활자가 투자했는데, 이들은 ‘세기의 프로젝트’라고 선전된 파나마 운하 건설에서 한몫 잡는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프랑스 업체 대표로 콜롬비아와 협상을 벌였던 인물이 바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해 이름을 떨친 레셉스였고, 파리의 에펠 탑을 세운 건축가 에펠도 이 사업에 참여했다.

레셉스와 에펠은 한껏 주가가 오르자 이 주식을 이용해 언론계와 정가를 매수했다. 그들이 운하 사업을 선전하고, 금융 특혜를 받기 위해서 매수한 의원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5백여 명에 달했다. 프랑스가 운하 건설에서 자동 탈락하기 전부터 미국은 파나마 운하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1850년, 당시 최대 경쟁국이던 영국과 조약(Clayton-Bulwer)을 맺었다. ‘앞으로 중미에서 세워지는 운하는 어느 나라도 독점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중립 조약이었다. 그 뒤 프랑스의 사정을 간파한 미국은 1900년에 중립 조약을 개정해 미국의 운하 독점권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고, 곧 이어 파산한 프랑스 업체를 헐값에 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나마 독립 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파나마에 주둔한 미군은 운하 조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부 전복 계획이나 게릴라 대책을 비롯해서 중남미 전역을 작전 지역으로 삼는 비밀 작전이 이곳에서 모의되었다. 1984년까지 파나마에 본부를 두고 있던 ‘미국 학교(School of America)’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 장교를 5만 명이나 배출했다. 남미에서 70∼80년대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군사 정권의 실세 태반이 이곳 출신이다.

파나마의 미국 공군 기지(Fort Howard)에서는 매년 1만5천 기의 첩보 정찰기가 떠서 남미 전지역을 감시했다. 미국 국방부는 이 기지를 미국의 눈과 귀라고 불렀다. 한때 6만5천 명까지 파나마에 주둔했던 미군은 1999년 12월31일을 기해 모두 철수했다. 미국은 100년 가까이 남미 최대 규모였던 군사 기지도 포기했다.

1977년 조약의 배경에는 1959년의 쿠바 혁명이 있다. 쿠바 혁명을 계기로 남미에서 거세진 반미 물결은 파나마에도 예외 없이 흘러들었다. 따라서 파나마의 어떤 정권도 운하를 되찾지 않고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 남미의 폭발적인 정세에 놀란 키신저는 ‘미국이 파나마의 요구를 거부할 경우 게릴라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경고를 의회에 보냈다. 그 결과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길었던 논쟁 끝에 카터 정부가 운하 반환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 미국 쪽에서는 2000년 이후에도 미군을 주둔시키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포트 하워드 기지에 ‘마약 대책본부’를 두고 미군 3천명이 주둔한다는, 클린턴이 1995년에 내놓은 제안이다. 여기에는 남미 군대도 참여시킨다고 했다. 이 제안을 둘러싼 협상은 파나마 측의 거부로 1998년에 중단되었다. 미국의 극우파와 상원의 보수파는 파나마 운하 반환이 미국의 국가 이익을 배반한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운하 반환 전후의 사태를 자세히 보면 이런 비난은 근거가 없어 보인다.

정글에 남아 있는 미군 포탄도 문제

먼저 포트 하워드 공군 기지가 맡았던 작전을 지난 12월 푸에르토 리코가 넘겨 받았다. 카리브 해의 섬과 에콰도르에도 새 기지가 세워지고 있다. 미군 정예 부대는 페루나 에콰도르에서 군사 작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브라질이나 콜롬비아 군을 이곳에서 훈련시킬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무엇보다 콜롬비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게릴라에 대한 대책이다. 콜롬비아가 미국으로부터 받는 군사 원조액은 지난 3년간 세 배로 늘었다. 콜롬비아는 이제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이어 미국의 세 번째 원조국으로 떠올랐다. 외신은 현재 미군 고문단 약 3백명이 콜롬비아군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곧 게릴라 지역으로 투입한다고 전한다. 지역 분석가들은 콜롬비아 정부가 무너지고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송에 문제가 생긴다고 미국이 판단할 때, 미군이 유엔군의 이름으로 직접 투입될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다.

미군이 남미에 주둔하는 것과 관련해서 파나마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중순 주목할 발언을 했다. 파나마 정부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하는 문제로 새로운 조약을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나마 야당은 이것이 1977년의 조약을 깨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이 모색하고 있는 ‘미군 철수 뒤’의 대안이 빛을 못볼지라도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다. 그것은 1977년 조약에 포함되어 있는 중립 내용이다. 이 조약은 ‘2000년 1월 이후 운하의 중립성이 위협받을 때 미군이 개입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미군 개입은 운하의 중립성이 위협받는 시점을 미국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파나마는 또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무엇보다 미군이 저질러 놓은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다. 미국은 베트남과 비슷한 열대성 기후인 파나마에서 1960∼1970년대에 베트남에서 사용한 생화학 무기를 실험했다. 이 중에는 고엽제나 우라늄탄도 들어 있다고 한다. 파나마는 5억 달러를 배상액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밖에 정글에 남아 있는 포탄도 문제다.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 이후 불발탄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국방부 대변인은 유탄 제거 작업이 미군의 기술 능력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남미의 민족을 해방하는 성스러운 자비의 손길’로부터 근 100년 만에 벗어난 파나마. 이 나라의 상처를 치유할 손길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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