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치한과의 대전쟁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7.03.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전철 안 성희롱 늘어 골치… 경찰 대대적 퇴치 작전
도쿄 경시청은 지난 2월 하순 1주일 동안 ‘치한 퇴치 작전’을 벌였다. 일명 ‘치한 전차’로 불리는 사이쿄센(埼京線)에 경관 천여 명을 집중 투입해 은밀한 작전을 펼친 결과 치한 30여 명을 검거했다. 도쿄 경시청의 이 전격적인 치한 퇴치 작전은 통근 전차 내의 치한 피해 신고 건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취해진 비상 조처였다.

도쿄 경시청은 작년 7월 도쿄 도심의 도쿄 역과 신주쿠 역에 ‘치한 피해 상담소’를 설치했다. 이 상담소에는 여성 경찰관이 집중 배치되어 치한 피해 상황을 조목조목 조사한다. 예를 들어 피해 부위가 유방인가, 엉덩이인가, 음부인가로 나누어 ‘의복의 표면’ ‘내의’ ‘몸 접촉’ 등으로 세분하고, 가해 수단을 손·무릎 등으로 구분하여 피해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도록 조사서를 작성한다.

도쿄 경시청의 한 관계자에 의하면 치한 피해 상담소에 신고된 피해 사례는 작년 6개월 동안 2백9건이었다. 특히 그중 30% 가량이 도쿄 근교 가와고에(川越) 시에서 도쿄 도심인 신주쿠(新宿)를 왕복하는 사이쿄센에서 집중 발생했다.

또한 도쿄 경시청이 작년 1년간 수도권의 전차 노선 별로 치한 검거 수를 분류한 결과 사이쿄센이 1백7건으로 단연 수위에 올랐다. 도쿄 도심을 순환하는 야마노테센(山手線)에서 검거자가 32명 나온 것에 비하면 세 배가 넘는다.

사이쿄센이 치한 전차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고, 도쿄 경시청이 사이쿄센을 치한 퇴치 작전의 제1 목표로 지목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3월13일 아침 8시, 가와고에 시를 경유하는 사이쿄센의 통근 쾌속 열차 안. 도쿄 도심이 가까워지자 전차 내의 혼잡도는 300%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혼잡하면 치한 발견은커녕 자기 몸을 지탱하기도 어렵다.수도권 사이쿄센이 최악 ‘우범 전철’

신주쿠 역 치한 피해 상담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치한이 출몰하는 때는 바로 전차내 혼잡도가 200%를 넘기 시작할 무렵이다. 특히 사이쿄센의 통근 쾌속 열차는 도쿄에 가까워질수록 논스톱으로 달리는 구간이 늘어나고 혼잡도가 심해 치한에게는 이 순간이 치한 행위를 벌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사이쿄센에서 검거된 치한 30여 명은 회사원·재수생·공장종업원 등 직업이 다양했다. 나이도 30대에서 50대까지 폭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치한은 상당수가 상습범이었다.

상습범 앞에서는 경찰의 단속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한다.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술이 불티나게 팔렸던 식으로 도착적 스릴을 즐기는 상습 치한들에게는 경찰의 단속이 오히려 짜릿한 긴박감을 배가해 주는 자극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일본에서 최근 치한 행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데는 치한 행위에 대한 처벌이 경미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제정한 ‘치한행위 방지 조례’에 따르면 치한에게는 5만엔 벌금형이 부과되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치한 행위가 어느 선을 넘는 경우에는 형법의 ‘강제 외설죄’가 적용되어 6개월 이상 7년 이하 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치한 행위 방지 조례와 강제 외설죄를 구분하는 기준은 뚜렷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내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거나, 유방에 직접 손을 뻗칠 경우에는 강제 외설죄가 적용된다. 그러나 경찰이 직접 그런 행위를 목격하고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도쿄 경시청은 검거한 치한은 조사가 끝난 후에도 바로 귀가시키지 않고, 반드시 치한의 직장이나 가정에 연락해 보호자가 나타나야 석방한다고 한다. 치한은 직장이나 가정에 자신의 파렴치 행위가 알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같은 방법이 재발 방지에 큰 효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경시청의 판단이다.

치한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치한 피해 상담소에 기록된 한 예를 들어보자. A라는 20대 여성은 사이쿄센을 이용하여 오미야(大官) 역에서 신주쿠 역까지 매일 통근하는 직장 여성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 사이쿄센 전차의 맨 뒤칸에 탄다. 어느 날 같은 또래의 남성이 다가와 혼잡한 틈을 이용해 필요 이상으로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똑같은 행위가 반복되었다.

참다 못한 A는 1주일 뒤 승차하는 차량을 다른 칸으로 바꿨다. 그러나 2~3일 후 다시 그 남성이 나타나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A는 그뒤 통근 시간대를 바꾸는 등 여러 방법으로 그 남자를 따돌리려고 했으나 1주일이 채 못되어 다시 그 남성에게 똑같은 시달림을 받았다.

이런 경우 이 남성은 ‘치한행위 방지 조례’가 적용되는 단순한 치한이 아니라 이른바 ‘스토커(stalker)’에 해당한다. 성 관련 협박 예방책 다룬 책도 나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법의 정의에 의하면 스토커란 ‘계획적으로, 고의로, 반복해서 타인의 주위를 배회하며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스토킹(stalking)’은 그런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치한도 타인의 주위를 배회하며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스토커의 일종이다. 그러나 치한 행위가 1회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계획적으로 반복해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스토킹과는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서의 남성처럼 치한 행위를 계획적으로 되풀이하게 되면 엄연한 스토킹이 된다. 일본에서 최근 출판된 <사랑과 광기의 스토커>라는 책에서 한 스토커의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 보자.

일본어 학교 교사 B는 같은 직장의 동료인 C라는 기혼 여성과 이른바 ‘불륜 관계’에 빠졌다. 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C는 B에 대한 독점욕을 드러내며 B의 주위 사람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 B는 C의 태도에 점차 염증이 나 C와의 불륜 관계를 청산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C는 B의 요구를 거절하고, B의 가족에게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협박하며 불륜 관계를 계속하자고 윽박질렀다. 참다 못한 B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C와의 관계를 청산했으나 결국 가정은 깨졌다.

이같은 예를 들 것도 없이 ‘스토킹’은 꼭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여성이라도 헤어진 남성에게 집요하게 전화 공세를 펼친다거나, 계속적인 교제를 강요한다면 엄연한 스토킹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지금 스토킹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치한 행위에 비교해 처벌할 법 규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치한 행위에 대해 형법의 강제 외설죄를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스토킹’이 지나치면 형법의 협박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토킹이 음성적으로 자행되는 속성을 지녔음을 감안하면 그 적발과 처벌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한국에서 지금 장난질 전화가 유행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성희롱도 스토킹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이런 치한 행위, 성희롱을 포함한 스토킹에서 자신을 방어할 대책은 없는가.

일본에서 최근 출판된 <스토커 대책 매뉴얼>이라는 책은 현재의 법률과 경찰 조직으로는 스토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자기 일은 자기가 지킨다’는 기본 원리를 명심하라고 일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치한 피해를 덜기 위해서는 출근길에 될 수 있으면 화려한 옷이나 미니 스커트는 피하라고 권한다. 또 최루 가스가 들어 있는 스프레이나 경보기와 같은 호신용 장비들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라고 권한다. 최근 일본의 전화기 회사는 장난질 전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전화 번호가 표시되는 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것도 집요한 스토커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로 각광 받고 있다.

일본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치한·성희롱을 포함한 ‘스토킹’은 풍요한 사회가 낳은 기형아들이 몰두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또 인터넷의 ‘버츄얼러브’ 즉 가상 정사가 범람하게 따라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분간하지 못해 급증하고 있는 유행 범죄이다. 문제가 더 심각해 지기 전에 한국에서도 처벌 규정 강화를 서둘러야 할 범죄들이기도 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