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퍼져가는 인종주의
  • 파리·高宗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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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극우파 세력 확장…국민들도 ‘외국인 차별’ 담은 反이민법에 호의적
페탱 원수의 친나치 파시즘 정권으로 귀결된 각종 극우파 운동이 창궐하던 30년대의 프랑스와 지금의 프랑스 상황이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적 함의를 분명히 담고 있는 반(反)이민법을 정부가 주도해 제정하고, 극우 정당이 파죽지세로 힘을 키우고 있는 요즈음,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나 외국계 프랑스인들, 반 파쇼 세력들은 어쩔 수 없이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살육을 예비했던 30년대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무장관 장 루이 드브레가 제안해 얼마전 프랑스 국회를 통과한 반이민법은 지난 93년 논란 속에 제정된 파스과법의 반이민 규정들을 더 강화한 것이지만, 각종 여론조사들은 프랑스인 세 사람 가운데 적어도 두 사람이 이 법에 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이 극우 정당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프랑스인 일반에 널리 퍼져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대패함으로써 등장한 좌우 동거 정부에서 당시 내무장관 샤를 파스과가 주도해 제정한 이전의 반이민법만 하더라도 외국인들의 프랑스 체류 조건과 프랑스 태생 외국인들의 프랑스 국적 취득 절차를 까다롭게 해 지식인들과 좌파 정치인들로부터 비판을 샀었다. 당시 파스과라는 이름은 좌파 유권자들이 보기에는 완고한 인종주의, 프랑스 제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드브레법에 견주면 몇해 전의 파스과법은 온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좌파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우파 정부가 눈치를 보았던 것일까?

항의 시위 거세지만 법 시행 유보 안될 듯

새 법에 따라 이제 유럽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프랑스에 체류하고자 하는 외국인은 매년 체류증을 갱신할 때마다 지문을 찍어야 하고, 프랑스 경찰은 불법 체류 혐의가 가는 외국인들의 여권을 압수하거나 아무 때고 그들의 일터와 자동차를 수색할 수 있게 되었다. 불법 체류 외국인을 추방하는 절차도 간소해졌다. 프랑스인들이 자기 집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 방문객의 입국과 출국을 경찰에 보고해야 한다는 당초 규정은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직전에 삭제되었지만, 체류 외국인의 지문 날인과 자의적 압수·수색 조항만 하더라도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비판을 사기에 충분하다.

지식인·예술인 들이 주동이 되어 10만명이 참가한 지난 2월 중순의 반드브레법 시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시위들이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폭력과 어울려 잇따르고 있지만, 이 법 시행이 유보될 것 같지는 않다. 이 법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프랑스인 일반의 여론도 여론이거니와, 시라크 대통령 자신이 지난주 유태인 단체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극우파 정당 국민전선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법 제정이 불가피했음을 확인하고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도 우파 정부는 국민전선과의 싸움을 명분으로 삼아 국민전선의 주장들을 법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드브레법이 국민전선의 압박에 따른 현정부의 대응이라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올해 68세인 르펜이 이끌고 있는 국민전선이 노골적인 인종주의, 프랑스 제일주의를 내걸고 프랑스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주류 정치권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의 프랑스 공수부대 요원으로서 알제리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르펜은, 지난 15년 동안 경제 침체에 편승해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 체류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국민전선 지지율을 1%에서 15%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50% 이상의 지지율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대통령 선거나 비례대표제를 배제하고 있던 그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전선 후보가 당선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 극우 정당은 제도 정치권에서는 지지율에 걸맞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사정이 변한 것은 95년 6월의 지방 선거 때부터다. 그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오랑주·툴롱·마리냔 세 도시에서 시장을 배출해 좌우 기성 정당들을 경악케 했다. 게다가 지난 2월9일에 있었던 남부 도시 비트롤의 시장 선거에서도 승리해 현재 네 도시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비트롤 시장 선거에서는 국민전선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집권 중도우파 연합과 제1 야당인 사회당이 합심해 사회당 후보를 밀었음에도 국민전선의 여성 후보 카트린 메그레가 당선되어 주류 정치권에 일격을 가했다.

이 도시들에서 펼쳐지는 국민전선의 행정은 그들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합치한다. 이 도시들의 국민전선 정부는 외국인이나 빈민층을 위한 사회봉사원들을 대량 해고하고 그 자리를 경찰관들로 메웠으며 공공 도서관에서 그들이 ‘좌익적’이라고 판단한 책들을 솎아내고 있다. 또 시가 재정 지원을 하는 각종 예술 행사에서 좌파 색채의 예술은 물론이고 전위 무용이나 재즈나 랩 음악, 아랍 음악 등 이른바 ‘비(非)프랑스적’예술들의 공연을 삼가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국민전선 지도부의 공적 발언들은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이다. 지도부 구성원들 모두가 범죄와 실업의 원인을 프랑스 체류 외국인에게 돌리면서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를 선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로 아랍인과 흑인 들에게 쏠렸던 르펜의 독설은 지난주 시라크를 ‘유태인 단체들의 인질’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이제 ‘성역’을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서 ‘성역’이란 대통령 시라크가 아니라 유태인이다.국민전선 당수 르펜, ‘성역’ 유태인까지 공격

실상 프랑스는 미국과 함께 유태인들의 힘이 가장 강한 나라이다. 유태인이 차지할 수 없는 자리는 대통령뿐이라는 농담이 있는 것도 미국과 비슷하다. 경제계· 언론계·문화계에 유태인이 많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서점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프랑스에서는 판금 서적이다. 유태인에 대한 차별 감정이 프랑스인들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은 아랍인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혐오와 질투가 복잡하게 섞인 감정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듯, 르펜도 지금까지는 유태인에 대한 비난을 되도록 에둘러서 표현해 왔다.

그런데 국민전선의 세가 나날이 뻗어가고 있는 요즘 와서는 전통적인 반유태 감정의 신비주의적 근거였던 유태인 음모설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발언들이 유권자에게 먹힌다. 12.7%에 이르는 실업률이 그 원인의 하나이기는 하겠다. 이번의 드브레법은 그런 극우파 유권자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아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인종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독일과 대조적이다. 독일 역시 통일 이후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지만, 지난주에 있었던 헤센 주 지방 선거에서 신나치 정당인 공화당은 고작 6.6%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이것은 93년 선거에서 이 정당이 얻었던 8.3% 지지율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다. 2월 말 현재 독일의 실업자 수는 4백70만을 넘어섰지만, 프랑스에서와 달리 극우 정당이 전혀 발을 못 붙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극우파가 준동하거나 인권 침해적인 반이민법 제정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는 극우파가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데 견주어, 프랑스에서는 극우파가 기성 정치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자라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우파에 적대적이라는 중도 우파 정부가 극우파의 주장을 반영한 입법을 주저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프랑스에 극우 정권이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현대사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침체에 편승해 극우민족주의적 선동가들이 등장한 때로부터 최초로 강제수용소가 세워지기까지는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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