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공략 고삐 죈 칠레의 ‘FTA 전략’
  • 부에노스아이레스·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4.04.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시장 찍고 중국·일본까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4월1일 정식으로 발효되자 칠레는 축제 분위기이다. 이 협정은 비단 양국의 무역 촉진뿐 아니라, 칠레의 아시아 진출을 가속화하는 교두보로서 더욱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양국 사이에 이 협정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복잡한 협상 끝에 양국 협상 대표들이 공식 협정에 서명한 것은 2003년 2월15일. 그로부터 한국 국회의 비준이 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칠레 당국자는 칠레가 한국, 즉 아시아 국가와 무관세 협정을 맺은 남미 최초의 국가이며,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소요한 것 모두가 기록적인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국회의 비준 소식이 알려진 직후 칠레 정부나 언론은 ‘비엔베니디토’(환영)를 연발했다. 한 칠레 언론은 ‘마침내 한국이’라는 제목을 크게 싣기도 했다.

칠레가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칠레 국제경제관계국장인 리카르도 라고스 씨는 칠레 일간지 엘 메르쿠리오와 가진 회견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칠레의 아시아 진출 전략에서 반드시 건너야 할 징검다리’라고 설명했다. 양국의 협정 비준 소식은 현재 칠레가 협상을 벌이고 있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국(미국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 등 21개국)을 비롯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도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칠레의 다음 목표는 인도·중국·일본. 아직까지 이들 3국과 합의해 발표한 공식 대화 일정은 없다. 그러나 칠레는 오래 전부터 물밑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인도와는 이들 3국 중 가장 먼저 구체적인 대화가 제기될 것이라고 외교가에서는 관측하고 있다. 양국은 이미 관세율 재조정 협상을 위해 농업·경제·금융·외교 분야 관계 장관 회의를 열었다.

칠레의 오랜 무역 상대는 미국과 유럽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세계화가 진전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칠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동남아 금융 파동으로 침몰할 것 같았던 시장이 경제 회복과 더불어 되살아나면서 칠레 처지에서는 아시아 시장이 미국·유럽 못지 않게 중요한 시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남미에서 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칠레뿐만이 아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축이 된 경제협력 기구 메르코수르(Mercosur) 또한 적극적인 아시아 진출 전략을 펴고 있다. 메르코수르를 주도하려는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지난 1월 말 인도를 공식 방문해 인도 정부와 무관세 협정 체결을 위한 예비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칠레의 처지에서 보자면 메르코수르는 아시아 진출 전략의 강력한 경쟁자인 셈이다. 브라질·아르헨티나는 메르코수르와는 별도로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와 개별적으로 적지 않은 교역량을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칠레에 갖는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칠레는 메르코수르에 참가하지 않고 대외 무역 정책을 펼치고 있다. 칠레가 독자적으로 무관세 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는 현재 한국을 비롯해, 미국·캐나다·유럽연합·멕시코 그리고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중앙아메리카 등 7개 블록이다. 이에 비해 메르코수르는 회원국(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우루과이) 사이의 무관세를 기조로 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메르코수르는 유럽연합과 상호 협조 차원의 실무 협의회를 창설하기로 하고 오는 5월 말 예정된 라틴 아메리카 정상회담 차원에서 협정을 체결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인도와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자동차·자동차 부품·의약품·화학품·가공 농산물 등 6백~8백 개 품목의 관세 철폐 품목에 합의해 서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브라질 상공개발 장관은 캐나다에서도 상업 협정 제안이 있었다고 밝혔다.

메르코수르의 대외 정책의 큰 목적은 정치·경제적으로 남아메리카를 하나의 블록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륙 내부 시장을 개방하고 남북 대서양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증대하는 등 남아메리카의 체제 통합도 시도하고 있다. 안데스 국가 블록인 캔(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베네수엘라·볼리비아)과 맺은 무관세 협정도 그 중 한 예다.

메르코수르는 자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지역 블록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치적 필요에서 뿐만 아니라 시장 측면에서도 요구되는 국제 시장의 큰 흐름이다. 농산물을 주무기로 하는 남미 국가들에게 아시아는 새로운 시장이다.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농산물 수요는 그 어느 경제 블록보다 커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성장 전망이 있는 안전한 시장은 아시아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지난 2년간 침체했던 칠레 경기가 최근 회복세를 보이면서, 한·칠레 무관세 협정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더 뚜렸해지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 내구재 수입은 17% 증가했다. 칠레 샌디에고 상업위원회의 한 연구 담당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 내구재를 사게 되는데, 지난해의 경우 4~5% 판매가 신장했다. 현재의 경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칠레의 지난해 수입 실적을 보면 자동차를 비롯한 내구재 품목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자동차는 지난해 29% 수입 증가율을 보여 1998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약 6억8천6백만 달러어치). 수입 자동차 가운데는 아시아 제품이 주종을 이루어 일본이 30%, 한국이 17%를 차지했으며,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전년도 대비 55% 증가율을 보였다. 무관세 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올해 수입량은 더 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가 한결같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칠레의 일간지 엘 메르쿠리오는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한국 농민들이 칠레 농산물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일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리카르도 라고스 국장은 한국 농산물의 수확기가 칠레의 수확기와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면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한편 한·칠레 상업위원회 리카르도 레스만 회장은 그동안 한국 자동차가 면세 혜택을 받고 있던 다른 수입차에 비해 7% 가까운 생산비 격차를 보였으나, 무관세 협정 발효로 격차가 사라짐으로써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