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들쑤시는 ‘통일교 스캔들’
  • 마닐라·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1997.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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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합동 결혼’한 여성 “학대 받았다” 주장… 교단 “터무니 없는 모략”
11월29일 토요일 아침 10시, 미국 워싱턴 교외 로버트 케네디 미식 축구 경기장에서는 1백85개국 3백60만 쌍이 결합하는 지구상 최대의 합동 결혼식이 열린다. 결혼식은 87개국에 위성으로 동시 중계된다. 축구 경기장에는 만여 쌍이 모일 뿐이며, 나머지는 각자 자기 나라에서 같은 시각에 모여 초대형 화면에 생중계되는 절차에 따라 ‘축복식’(결혼식)을 치른다. 주례는 문선명 목사. 같은 시각 필리핀에서도 2만 쌍이 이 행사에 참석한다.

작년 1월23일 마닐라 국제회의장 대강당에서는 9백83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다. 신부는 모두 필리핀 여성이었고, 신랑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주례는 곽정환 목사. 신랑 신부는 결혼식 하루 전날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결혼 리셉션에 참석한 후 헤어졌다. 신부들은 신혼의 단꿈은 훗날로 미룬 채, 한국에 초청될 날을 약속 받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개월 후 한 젊은 여인이 서울 주재 필리핀대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통일교 주선으로 한국인과 결혼한 마릴린 페르난데스 바탈. 그는 한국인 남편이 농사일을 강요하고 다른 남자들과 섹스하기를 강요해 탈출했다며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다. 마릴린에 이어 10여 명의 필리핀 여성이 전화로 비슷한 호소를 해왔다. 대사관의 두마피아스 공사는 본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비밀 보고서를 띄웠다. ‘통일교가 주선해 한국 남성들은 2천 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 여성들을 한국에 데려왔다. ‘신부’들은 가정부나 공장 노동자 또는 농사일을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매춘을 강요당하거나 집 밖에 나갈 자유도 없이 감시당하며 강제 노역에 종사한다고 호소해 오고 있다.’

필리핀 언론 “결혼 미끼로 위장 취업·매춘 주선”

이 무렵 또 한 사람의 필리핀 여성 아이다 산토스가 서울에서 마닐라의 이민국으로 전화를 걸어 “남편이 나를 일만 시키다가 버리고 사라졌다. 나를 귀국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필리핀 국립수사국·이민국·외무부는 합동조사반을 1주일간 서울에 파견했다. 대사관 보호를 받다가 귀국한 마릴린이 이곳 ABC·CBN 텔레비전에 출연해 한국에서의 ‘악몽’을 떠들어 대자, ‘결혼을 미끼로 위장 취업과 매춘을 주선한 통일교 스캔들’은 필리핀 언론을 뒤덮었다. 마릴린은 하원 외무위원회에 나가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에서 하루 일하면 필리핀의 한달치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한국 남자와 결혼하라는 통일교도의 말을 듣고 한국에 가서 결혼했다. 소개비로 2천1백 페소(70만 원)를 지불했다. 남편 조씨를 따라가 보니 충북 제천 근처 농가였다. 해보지도 않은 농사일과 집안일을 밤낮으로 시키고 시댁 식구들이 나를 감시했다. 얼마후 남편은 집에서 나가고 남편 친구들이 나를 섹스 파트너로 삼았다.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나와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다.”

수도권인 마닐라 케존 시 사마로 32번지 통일교 본부. 넓직한 8백여 평 대지로 이어지는 정문과, 2층 단독 주택형 사무실 뒤뜰에 있는 단층 부속 건물. 그 어디에도 통일교라는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30여 직원 대부분은 현지인. 필리핀 남편의 성을 따라 어거스틴 윤숙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국인 직원은 마릴린이 진술한 내용을 모두 부인했다. 그는 마릴린이 처음에는 독신이라고 했으나 나중에 애가 딸린 유부녀라는 사실이 발각되자 황당 무계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릴린이 찾아간 필리핀대사관의 두마피아스 공사는 지난 11월18일 마닐라에서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정반대로 말했다. 그는 마릴린의 말이 대부분 사실이며,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청문회 증인이 왜 마릴린밖에 없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다른 피해자들은 창피하거나 통일교의 보복이 두려워 증언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마릴린에게 안전을 위해 산토스라는 가명을 쓰도록 했다고 말했다.
통일교측 “애 딸린 유부녀, 들통나자 적반하장”

필리핀 여성들이 공포에 질려 증언을 못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민국 첩자로 결혼식장에 잠입했던 여직원 3명은 하원 청문회에 당당히 나타났다. 그 중 신부를 가장해 결혼식을 올린 리사 G.는 “결혼식 6개월 전부터 교회본부에서 강습을 받았는데, 교회측은 한국에 가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일할 것과 결혼 3개월 전까지 남편과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남편은 결혼식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났다”라고 증언했다.

리사의 남편이 정작 한국으로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혼식이 있던 그날 밤 ‘적지 않은’ 한국 남성들이 마닐라 시내 호스테스바에 몰려갔고, 개중에는 술에 취해 싸운 사람도 있었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문회 스타 마릴린과 첩자 리사의 증언은 센세이셔널리즘에 약한 이곳 언론을 흥분케 했다. 또 신랑·신부의 출입국 금지에 자극받은 통일교도들이 서울 필리핀대사관으로 몰려가 항의 데모를 벌였다. 두마피아스 공사는 그로부터 4개월 후 본부로 전근되어 현재 외무장관 특별 고문으로 있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기 전근되었는지 그는 확인해 주지 않았다.

‘수류탄 한방이면 당신은 끝장이다.’ 수사가 한창이던 작년 6월, 당시 이민국장 베르셀레스는 한 장의 협박 편지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해외취업공사(OEA) 소속으로 서울 파견 조사팀의 일원이었던 갈베스 변호사도 비슷한 협박 편지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마릴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편지는 하나같이 협박 이유와 발신자를 밝히지 않았다. 베르셀레스는 협박 편지를 받은 지 2개월이 지나 기자 회견을 한 직후 갑작스레 사망했고, 언론은 그의 죽음의 배후와 의혹에 관해 요란한 기사를 쏟아놓았다. 그러나 그가 타살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사인은 심장마비로 판명되었다.

후임 벤도자 이민국장과 신임 기고나 법무장관은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통일교 포교 금지를 말라카냥(대통령궁)에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6월 초 법무장관은 국립수사국(NBI)의 수사 결과와 건의에 따라 통일교 간부들을 검찰에 정식 고소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문선명 목사, 주례를 선 곽정환 목사, 김계영·김병우 전도사, 필리핀 통일교 회장·부회장 등 15명이 피소되었다. 통일교 외곽 단체로 합동 결혼식을 공동 주관한 필리핀이상향재단(ICFP) 간부 30명도 피소되었고, 전원 출국 금지 명단에 올랐다.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통일교측 반격 전략은 세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첫째, 종교 탄압을 앞세운 법적 대응이다. 통일교 수석 법률고문 사기삭 상원의원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합동 축복식이 왜 필리핀에서만 문제가 되는가 ?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돼 있다”라며 법적 대응을 선언했다.

둘째, 그동안 꾸준히 구축해온 관·정·재·언론 계의 인맥을 총동원해 법무부가 고소를 취하하도록 다각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라모스 대통령, 데 베네시아 하원의장, 라우렐 전 부통령, 엔릴레 전 국방장관 등 통일교가 믿는 인맥을 동원해 내년 5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LAKAS-NUCI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노리는 기고나 법무장관에게 고소 취하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교 전략의 핵심 대상은 언론계다. 통일교측은 그동안 인쇄·방송 매체의 중견 언론인들을 한국과 미국으로 꾸준히 초청해 왔다. 이들 대부분은 긴 기사와 사설을 통해 호의적 기사를 썼다.

통일교의 반격 전략이 어느 정도 주효했는지, 아니면 필리핀의 고질적인 느림보 사법 절차 때문인지, 현재 피소된 통일교에 대한 사법 처리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재판 한 번 열리지 않고 있다. 그동안 비자 신청 접수조차 거부했던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필리핀 정부는 최근 선교용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출국 금지도 약간 완화되었다. 인력 송출 회사들이 신부들을 한국에 보내지 않는다고 서면 보장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 제3국 취업을 허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 정치 상황과 신·구 종교 갈등 얽혀

법무부가 위장 결혼 당사자로 내세운 증인은 마릴린 단 1명이다. 지금껏 다른 증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법무부의 뼈아픈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상원에서 위장 결혼 조사 결의안을 공동 제출했던 엔릴레 의원이 최근 이를 취소한 사실과, 데 베네시아 하원의장이 ‘통일교도와 결혼한 여성을 마녀 사냥하듯 무차별 비하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고 방어한 사실은 통일교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통일교 문제는 법적 문제 외에, 국내 정치와 신·구교 간의 갈등, 국민 정서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사리 풀릴 수 없을 것 같다.

통일교는 이번 파동을 전화 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방과 도시의 크고 작은 언론 매체들이 너나없이 ‘팔려간 신부’이야기를 다루는 동안, 통일교는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종교 집단의 이해 관계를 넘어 한국과 필리핀 두 나라의 남녀 9백여 쌍이 거의 2년 간이나 결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심각한 인도적·사회적 문제로,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최근 이곳 종교·언론계 지도자들 사이에 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적어도 내년 5월 대통령 선거 때까지 이들에게 만남의 광장이 열리지 않을 것 같다. 5월이 훨씬 지나도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노처녀가 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러나 내 남편은 자꾸 늙어가는데 언제까지 날 기다려 줄까요?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죠?”전화 인터뷰로 만난 일로코스노르테 출신 스물두 살 처녀 제인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오페라 <팔려간 신부>의 필리핀판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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