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대륙 강타한 ‘에너지 지진’
  • 부에노스아이레스·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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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전력난이 ‘진앙’…인접국으로 번지며 ‘도미노 현상’
전력과 천연 가스 수출국 아르헨티나가 때아닌 전력난을 겪으면서 그 파장이 칠레·우루과이·볼리비아는 물론 베네수엘라·브라질에까지 번지고 있다. 지난 3월 말 아르헨티나 정부는 ‘전력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국내 전압을 220V에서 209V로 낮추는 동시에 산업용 전기와 천연가스 공급을 제한했다.

또 우루과이에 대한 전력 수출과 칠레에 대한 천연 가스 수출을 잠정 중단하고, 전력과 석유 부족분을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에서 수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미 계약한 볼리비아산 가스도 서둘러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에서 전력 위기 조짐이 보인 때는 지난해 말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계절 수요가 많은 올 6~8월께(남반구는 이때가 겨울철) 전력 위기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지난해 말 더위가 극성을 부리면서 위기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아르헨티나의 부문별 전력 생산 비율은 40%가 수력, 10% 안팎이 핵 발전, 그리고 50% 이상이 화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력은 값이 싼 천연 가스를 주로 사용하는데, 천연 가스 공급 부족으로 문제가 생겼다. 수력 부문은 지난해 말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발전량이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전력 수요는 경기 회복까지 동반한 더위 탓에 전년에 견주어 11%가 증가했다.

경기 회복·더위 겹쳐 전력 수요 급증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번 전력 위기의 책임을 민영화한 에너지 회사들에게 돌린다. 그러나 기업들은 손해를 보면서까지 무작정 전력을 공급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아르헨티나는 디폴트 선언 이후 정부가 환율 변동 목표치를 정해놓은 데다가 물가를 잡기 위해 전기값 인상을 억제해 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일반 가정에서 많이 쓰는 압축 가스의 가격 인상을 앞당기고, 휘발유를 비롯한 유류 가격도 5월 이후 재조정하겠다는 회유책을 내놓았다.

아르헨티나의 전력 위기에 브라질은 원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브라질은 2001~2002년 극심한 전력 위기를 맞았을 때 아르헨티나로부터 전력 1천MW를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양국이 체결한 전력 협정에 의해 추가로 5백 MW를 지원받은 바 있다. 브라질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보은’한 것이다.

하지만 브라질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가 전력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전력은 여전히 부족했고 곧 남미 전역이 소동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 4억 달러어치를 공급받는 대신, 소 2만5천 마리와 농축산 관련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이같은 ‘물물 교환’ 방식에 대만족을 표시했다고 한다.

반면 우루과이는 울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전력 수출 중단 선언으로 우루과이 역시 졸지에 전력난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국 전력 소비량의 20%를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해 쓰고 있는 우루과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석유 화력 발전소(전력 생산 단가가 수입 전력에 비해 5배나 비싸다) 2기를 비상 가동하는 한편, 브라질 전력을 수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전력 수출 중단 결정에 당황하는 나라는 우루과이뿐만 아니다. 특수한 지리적 조건으로 전력 수요를 절대적으로 화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칠레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칠레는 화력 부문에 소요되는 ‘땔감’의 절반을 아르헨티나산 천연 가스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칠레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천연 가스 수출 중단 발표에 대해 즉각 ‘과연 아르헨티나가 믿을 만한 가스 공급국인지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러 팔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없어서 팔지 못하는 데에야 칠레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급해진 칠레는 1978년 이래 외교 관계를 단절한 볼리비아에까지 도움을 청할 태세지만, 볼리비아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다.

볼리비아는 가스를 판매하라는 칠레의 제의에 대해 양국간 해묵은 현안인 볼리비아의 태평양 진출 통로 문제를 협상하자며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1978년 페루·칠레·볼리비아 3국은 한 차례 전쟁을 치른 바 있다. 3국의 접경 지역에서 금광과 은광 등 ‘노다지’가 발견되면서 이를 두고 갈등을 빚은 것이다. 볼리비아는 당시 전쟁에서 패배해 4백km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의 해안을 잃고 태평양 진출을 봉쇄당한 바 있다. 그 뒤 볼리비아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토 문제를 재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칠레 정부는 이를 철저히 외면해 왔다.

볼리비아는 정정까지 불안해져

아르헨티나 전력 위기는 엉뚱하게도 볼리비아의 정정 불안까지 야기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전력 위기가 터지자마자 브라질(전기)과 볼리비아(가스)에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가 과거 숙적이었던 칠레에 천연 가스를 팔아왔다는 이유로, 칠레는 물론 아르헨티나에도 가스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볼리비아 노동 세력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 있기 시작했다.

볼리비아에서 가스 판매 문제는 정권의 안위를 좌우할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다. 곤잘로 산체스 데 로사다 전 대통령도 대미 가스 수출 문제 때문에 지난해 9월 실각한 바 있다. 볼리비아 노조 지도자들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강행할 경우, 총파업까지 불사하겠다며 현 카를로스 메사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4월13일 볼리비아에서는 이 문제를 빌미로 내각 구성원 15명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고, 에너지 관련 부처 각료 일부가 경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엄청난 소동을 불러일으키며 ‘에너지 지진’의 진원지가 되었던 아르헨티나에서 아직까지 단전이나 가스 부족 사태 등 당초 우려했던 극단적 이상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에너지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2007년에야 아르헨티나 전력 시스템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때까지 남미대륙 전체를 뒤흔들 전력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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