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둔 프랑스, 공직자 겸직 반대 운동 확산
  • 파리·高宗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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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직자 겸직 금지 시민운동 확산… “정치 폐쇄성·부패의 주 원인”
지난 4월21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국회 해산을 공포하면서 프랑스 정가는 한 달 남짓한 선거 국면에 돌입했다.

국회를 해산한 결과 당초 내년 3월로 예정되었던 다음 총선이 오는 5월25일과 6월1일로 앞당겨짐에 따라 실업·인종주의·극우파·유럽 단일 통화 등 프랑스의 여러 사회 정치적 쟁점들이 지금까지보다 더 잦은 빈도로 정치인들의 말잔치에 동원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전반적으로 집권 중도우파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상을 깨고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가 국회에서 다수당이 될 경우 프랑스에는 우파 대통령에 좌파 내각이라는 좌우 동거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전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두 차례의 좌우 동거 정부가 좌파 대통령에 우파 내각이었던 것과는 정반대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에서 총선이 대통령 선거 못지 않은 비중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권력 기반 강화와 정부 교체를 각각 노리는 좌우 정당들의 이런 선거 운동과는 별개로 요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시민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시민운동 단체들이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의 핵심은 공직자들의 겸직 금지다.

프랑스는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한 정치인이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를 넘나들며 겸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예컨대 현직 총리이자 집권 공화국연합 총재인 알랭 쥐페는 보르도 시의 시장이기도 하다.

상·하원 의원 겸직률 95% 넘어서

그가 보르도에 머무르는 것은 1주일에 하루뿐이다. 시 행정의 전체를 책임져야 할 시장이 1주일에 엿새나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이다. 또 국정 전반을 책임져야 할 총리가 1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파리를 비우고 보르도에 내려가야 하는 셈이다. 쥐페의 경우는 그가 중앙 정치에서 맡고 있는 비중이 워낙 커서 더 두드러질 뿐이지 겸직 정도로는 오히려 온건한 편이다. 한 정치인이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에 걸쳐 공직을 4~5개 겸임하고 있는 경우가 프랑스에서는 흔하다.

예컨대 하원의원이 지방 도시의 시장, 도의회 의장, 유럽의회 의원 따위를 겸하는 것이 예사다. 하원 의원 5백78명 가운데 2백97명이 지방 도시의 시장이고, 88명은 도의회 의장이며, 2백43명이 시의회 의장이다. 또 상원의원 3백21명 가운데 1백53명이 지방 도시의 시장을 겸하고 있고, 34명은 도의회에서, 1백83명은 군의회에서 공직을 겸하고 있다.

상·하원 의원 8백97명 가운데 의원 직만을 수행하는 사람은 99명(하원 42명, 상원 57명)밖에 안된다. 요컨대 의원의 90% 가까이가 지방 정치에서 겸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겸직 의원 가운데는 지방 정치에서 공직을 2개 이상 지닌 경우도 있고, 또 유럽의회 의원을 겸하고 있는 경우도 흔해서 실제 겸직률은 95%를 넘어선다. 의원들만 겸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현직 각료의 3분의 1이 도의회 의장이거나 시의회 의장이다. 이런 관행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공직자 겸직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지방 정치 수준에서만 공직 겸임이 허용된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주 의회 의원이 시장을 겸임할 수 있고, 이탈리아의 경우도 시장과 시의회 의장을 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 정치 수준에서도 그것이 허용되고 있다 뿐이지 실제로 겸임하는 정치인들이 그리 흔치 않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임기를 끝내고 지방 정계로 진출해 시장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흔하지만, 장관이나 국회의원과 시장 직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는 없다.

영국의 경우 공직자들이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에서 겸직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치문화적으로 겸직은 금기에 속한다. 예컨대 하원 의원 선거에서 패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지역 공직을 겸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에서 공직을 겸하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스스로가 그 겸직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공직 겸임을 허용함으로써 프랑스 정치가 앓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병은 그 폐쇄성이다. 9백명에 이르는 국회의원 대부분이 의원직 말고도 한 자리 이상씩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지방 정치에서 천개가 훨씬 넘는 자리가 실제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 되는 것이다.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지방 정치까지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여성과 젊은이들의 정치 진출이 구조적으로 봉쇄된다.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스 중심으로 한 ‘패거리 정치’도 양산

프랑스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50년 전부터 5.5%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여성들이 국가 수반이나 정부 수반에서부터 웬만큼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고, 회교권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아주 낮은 비율이다. 겸직 제도 자체가 여성의 정치 진출을 봉쇄하는 근원적 이유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소수 정치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서 여성의 정치 진출 가능성을 낮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겸직 제도가 낳은 프랑스 정치의 이런 폐쇄성은 흔히 부패로 이어진다. 지방 정계의 공직을 겸하고 있는 중앙 정치인은 지방을 거의 비우게 되므로, 다음 선거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지방의 이런저런 단체들이 무리한 청탁을 해도 그것을 거절하기가 힘들고, 그래서 지방의 지지자들과 겸직 정치인 사이는 흔히 고객과 상인의 관계가 되고 만다.

그래서 중앙 정치인은 아이들의 학교 배정이나 장학금 수혜, 연금 지급 같은 지방 유권자들의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해결사로 나서서 ‘표’를 사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주로 중앙에 있으므로 지방에는 대리인을 박아 놓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 대리인은 책임감을 지닌 독립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겸직자의 비서나 부하 노릇을 할 수밖에 없어, 결국 보스를 중심으로 한 패거리 정치를 낳게 되는 것이다.

국회나 유럽 의회가 회기 중에 텅텅 비는 것도 이런 겸직 제도의 결과라고 정치학자 이브 메니는 말한다. 지난 2월 반이민법으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소란스러웠을 때에도, 영화 감독을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한 대규모 반대 시위가 있기 전까지는 국회에서 그 법의 세부 조항에 대한 어떤 토론도 없었고, 묘하게도 정치권만이 그 문제에 대해 조용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겸직 제도 때문에 정치인들이 한 군데에만 정신을 쏟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구 3만~4만 정도의 도시 행정을 맡는 것도 그 자체가 풀타임 직업일 수밖에 없는데, 국회의원 직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 정신분석학자 쥘리아 크리스테바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역사학자 자크 르고프, 가수 장 자크 골드만, 미디어학자 레지스 드브레 등 문화예술인 70여 명은 최근 ‘모든 정치인에게 하나만의 공직을’이라는 제목의 반겸직 운동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 정치인들에게 겸직 포기 선언을 권유하는 한편 겸직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 얼마 만한 반향을 얻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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