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열린 남극조약회의
  • 이서항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
  • 승인 199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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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과학 역량 높일 계기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원시 대륙 남극을 국제적으로 관리하는 제19차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남극조약회의)가 지난 5월 8일부터 2주 동안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남극조약회의는 61년 발효한 남극조약에 따라 남극의 관리·보호·운영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논의하는 최고의 의사협의·결정기관이다. 영·불·러·스페인 4개 국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남극문제에 관한 유엔 총회’로까지 불리는 중요한 국제 회의이다.

한국은 86년 11월 남극조약에 가입한 이래 남극반도 킹조지 섬에 세종과학기지를 설치하는 등 꾸준히 남극 탐사 활동을 펴 왔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89년 10월 남극조약의 상임이사국이라 할 수 있는 협의당사국 지위를 획득하고, 그후 5년여 만에 서울로 정기 회의를 유치한 것이다.

남극조약회의 개최가 한국인에게 의미를 더해 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남극과 그 주변 해역이 지닌 중요성 때문이다. 지구 표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지구의 여러 대륙 중 다섯 번째로 큰 남극은, 우선 과학적인 면에서 볼 때, 다른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특성과 특이한 자연 환경으로 인해 지구와 태양과의 상호 작용을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천연의 과학실험장 구실을 해왔다. 또 남극의 얼음은 한번도 녹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수직 10㎝의 얼음은 최소한 천년 이상의 지구 기후 변화와 관련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남극을 일컬어 ‘냉동된 타임캡슐’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남극이 지닌 과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남극은 지구 전체의 환경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남극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든지 온 지구에 영향을 미치며, 지구 기상이나환경의 심각한 변화는 모두 이곳에서 제일 먼저 관측된다.

‘환경 훼손 책임보상원칙’ 합의 큰 성과

자원 면에서도 남극의 중요성은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제까지 알려진 남극의 부존 자원은 크릴새우로 대표되는 수산자원, 석유·천연가스, 금속 광물, 빙산 등을 포함하여 그 수와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서도 크릴새우의 잠재어획고는 무려 1억t 이상이어서 세계 인구 폭발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식량자원으로 꼽힌다.

남극이 지닌 중요성 때문에 남극조약회의는 지난 30여 년간 여러 가지 남극 환경 보호조처를 취해 왔다. 특히 남극조약회의는 91년부터 1년여 협상한 끝에 남극조약을 보완하는 환경보호 의정서를 채택했다. 이 의정서는 1천4백만㎢에 달하는 남극 대륙과 그 주변 해역을 ‘평화와 과학을 위한 자연보존 구역’으로 지정하고, 앞으로 50년간 석유를 비롯한 광물자원 개발 금지와 모든 과학 활동에 대한 사전 환경영향 평가제 도입 등 강력한 환경 보호 조처를 시행키로 명시했다.

이번 서울회의에서도 남극 환경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과학 탐사 활동이나 관광을 할 때 남극 환경을 훼손할 경우 복구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엄격한 책임배상 원칙을 도입하기로 합의한 것은, 서울회의의 커다란 성과이다. 그러나 남극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 및 남극조약체제 운영과 관련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상설 사무국 문제는 설치 원칙만 합의하고 장소에 대해서는 관련국의 이해 대립으로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미·영·불·칠레·아르헨티나 등 남극 활동이 활발한 26개 협의당사국과 16개 일반당사국 등 42개국과 남극탐사과학위원회(SCAR) 등 10여개 국제기구 대표를 비롯한 3백여 외교관·과학자가 참가한 남극조약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것은,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번 서울회의를 통해 인류의 미래가 달린 남극의 관리와 환경 보호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은 것은 서울에서 지구의 장래를 논의한 것과도 같다. 남국조약회의 서울 개최는, 남극이라는 범세계적 문제에 대한 한국의 외교 및 과학탐구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릴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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