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선언했다가 궁지 몰린 시라크 대통령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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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여론 악화, 인기 10% 하락… “96년 5월 이후 핵실험 중단” 유화책 제시
요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국내외 입지가 대단히 어렵다. 석달 전 취임 당시 프랑스의 국익 신장을 최우선 목표로 한 신드골주의를 내세워 환호를 받던 그가 얼마전 내린 돌이킬 수 없는 결정 때문에 갈수록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최근 주간 <보트르 디망슈>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그에 대한 지지도는 취임 때보다 10%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 6월13일 지방 선거 1차투표 직후 시라크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발표한 핵실험 재개 결정에서 비롯했다. 그는 9월부터 내년 5월까지 남태평양의 프랑스령인 무루로아 환초에서 모두 여덟 차례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핵실험 대상은 프랑스가 개발한 신형 잠수함 탑재 미사일 핵탄두이다.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 확산

핵실험 재개는 전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92년에 핵실험을 동결하기로 선언한 지 3년 만에 나온 것이다. 핵실험 재개 결정은 시라크의 신드골주의적 정책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50년대 중반 이미 핵실험을 끝마친 미국과 소련이 핵동결 상태에 들어갔던 60년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프랑스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해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국제 여론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채 때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배타적인 외교 행보를 거듭해온 프랑스 정부 특유의 고집과 독선이 시라크의 외교 스타일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라크의 이번 핵실험 재개 결정은 과거와는 양상이 크게 다른 국내외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랑스가 속한 유럽연합(EU) 회원국을 포함해 전세계 38개국의 빗발치는 비난 성명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여론도 갈수록 시라크에 등을 돌리고 있다. 최근 <보트르 디망슈>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 62%가 핵실험 재개 결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외교 정책에 관한 한 국내 여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온 관례에 비춰볼 때 이런 결과는 시라크에게 꽤나 실망스런 것임에 틀림없다. 프랑스 국내 여론을 주도하는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프랑스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는 핵실험을 강행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철회하는 것이 시라크 대통령에게 덜 치명적이 될 것’이라며 핵실험 중단을 촉구했다.
국제 여론도 심상치 않다. 독일에서 조직적으로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현재 반프랑스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 호주에서는 프랑스의 항공 회사를 아예 입찰 후보에서 제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원자폭탄 피해국인 일본에서는 제1야당인 신진당이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을 호소하고 나섰다. 시라크 대통령은 핵실험 재개 결정에 따른 국제 사회의 비판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나, 프랑스 제품 불매 운동으로까지 번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 같다.

“핵실험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국내외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정작 시라크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프랑스가 보유한 핵무기의 안정성과 앞으로 실험실 내에서 이뤄질 모의 핵실험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서도 최소 7~8회의 핵실험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핵실험 재개 결정은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 말까지 프랑스를 포함해 미국·영국·중국·러시아 5대 핵보유국이 핵실험 전면 금지를 요구하는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가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결정이 프랑스가 핵실험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그도 최근 국내외 반발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자 ‘내년 5월 모든 핵실험이 완료되면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핵실험을 일절 하지 않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다시 말해 어떤 형태의 핵실험도 완전히 금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프랑스 정부는 설령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4파운드 이하의 핵폭발 물질에 대한 실험은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실험에 대한 반대 여론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가뜩이나 서로 눈치만 보며 핵실험 중단을 미뤄 온 다른 핵보유국에게도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핵실험을 영구히 중단하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의 지하 핵실험장인 네바다에서 핵실험을 해온 영국도 곧 미국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최근까지 모두 2백4회나 핵실험을 했는데, 미테랑 대통령 치하인 5공화국 시절에 가장 많은 86회를 실시했다. 특히 무루로아 환초가 위치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공중 및 지하에서 실시한 핵실험은 5~20kt이 63회, 20~2백kt이 56회, 1백50~천kt급이 54회였다. 68년 남태평양상의 팡고타파와 무루로아 환초 상공에서 실시한 2회의 핵실험은 메가톤급이었다. 주목할 사실은, 2백4회의 핵실험 가운데 무려 1백73회를 무루로아 환초에서 실시했다는 점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평소 충동적인 외교 행태로 구설에 오르내리던 시라크 대통령이, 핵실험 재개와 같은 중대 사안을 결정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데 따른 외교 실책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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