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의 ‘제갈 공명’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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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서머스 재무 부장관, 미국의 황금 시대 일군 ‘경제학 천재’
요즘 미국 경제를 두고 ‘황금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얘기가 곧잘 나돈다.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자연 실업률 6%에도 훨씬 못 미치는 4.3%에서 맴돌고 있다. 70년 이후 최저이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65년 이래 최저인 1.4%에 머물러 있다. 주식 값은 5년 전에 비해 무려 125%나 뛰었다.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간 82년 이래 지금까지 창출된 일자리가 무려 3천2백만 개나 된다. 해마다 2백만 개씩 새로 생겼다는 얘기다. 연방 재정 적자도 20년 만에 처음 흑자로 돌아섰다. 경제가 호황이면 인플레가 생기는 법인데 이마저 볼 수 없는 것이 요즘 미국 경제다.

이처럼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황금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 1기를 시작하던 93년 초부터다. 바로 그 해 4월 세인의 눈길을 끌 만한 일이 발생했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세계은행(IBRD)의 수석 책임자(Chief Economist)로 일하던 쟁쟁한 이론가가 재무부 국제담당 차관보로 발탁된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이 오늘날 미국 경제를 황금 시대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한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43)이다.

서머스 부장관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나 앨런 그린스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비하면 그다지 언론에 자주 오르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국제담당 차관보에서 2년여 만에 부장관으로 승진한 95년 8월 이래 그는 사실상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조세 정책 같은 국내 문제든 아시아 금융 위기 같은 대외 문제든 클린턴 대통령이 추진하는 모든 경제 정책이 그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하자면 월 스트리트 투자가 출신이어서 이론에 밝지 못한 루빈 장관을 도와 경제 정책의 큰 줄기를 도맡아 챙기는 셈이다.

특히 그는 95년 외환 위기에 빠져 휘청거리던 멕시코에 대한 지원을 놓고 미국 의회에서 논란이 벌어지자 ‘긴급 구제 자금을 지원해 멕시코를 살려야 미국 경제도 산다’는 논리를 펴 이를 관철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 지난해 여름 동남아시아에서 터진 외환 위기가 한국에까지 상륙했을 때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한 긴급 구제 금융의 필요성을 가장 힘있게 주창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렇다면 그가 분석한 미국 경제는 어떤 것일까. 그는 미국 경제가 오늘날 호황을 누리게 된 원인을 세 가지 이유에서 찾는다. 우선 80년대 들어 수천억 달러로 급속히 불어난 누적 재정 적자를 말끔히 해소해 그 여력을 민간 부문에 집중 투자한 것이다. 원래 정부의 재정 적자가 불어나면 민간 부문 투자가 위축되기 마련이다. 민간 부문에 쓰일 금융기관의 돈을 정부가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일찌감치 구조 조정을 끝내 세계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저력을 일군 일이다. 그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세계 경제는 그 틀이 미국 경제를 중심으로 완전히 다시 짜이고 있다고 한다.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이지만, 인터넷이나 컴퓨터 같은 첨단 통신 시장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나 월마트와 같은 식품 시장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에 하나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의 표준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년 예산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정부 부문의 소비를 과감히 줄이고 수출을 확대한 일이다. 오늘날 연방 정부의 일자리는 5년 전보다 30만 개 줄었지만 민간 수출 부문 일자리는 수백만 개 늘어났다. 다시 말해 미국 기업을 세계화하고 세계 각국의 시장 개방을 관철함으로써 일자리를 많이 창출했다는 것이다.
서머스 “IMF는 절대 필요하다”

요즘 부쩍 세간에 떠도는 미국 경제 거품론에 대한 그의 반응은 조심스럽다. 그는 미국 경제가 지금은 지나칠 정도로 호황을 누리지만 언젠가 실업률이 오르고 인플레가 찾아오면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경기가 과열해 인플레가 닥치고 불황에 접어드는 것은 경기 순환 탓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런 현상을 미리 예견해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정책 당국자의 실책이 더 크다고 본다.

현재 아시아 전체가 경제 위기로 휘청거리기는 해도 미국 경제가 워낙 탄탄하므로 큰 영향은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다 보니 값싼 해외 제품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이에 따라 자연히 무역 적자가 늘고 있지만 그는 별 걱정을 않는다. 지속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방해 수출을 늘리고 국내 저축률을 높여 무역 적자를 줄여 가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끈질기게 주장하는 국제통화기금(IMF) 폐지론에 대해 그는 ‘일고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병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의사만 탓하는 심보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아시아에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때 만일 국제통화기금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해당 국가는 자본의 급속한 해외 유출은 물론이고 고금리, 낮은 경제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 여기에 국민의 불안한 심리까지 겹쳐 곧바로 국가 파탄 상황으로 치달았을 것이 분명했다고 본다. 또 이런 온갖 문제를 그나마 해결할 수 있는 기관은 긴급 구제 금융을 제공할 수 있는 국제통화기금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해박한 경제 이론가 덕분에 미국 경제는 현재 정확한 궤도 위에서 쾌속 항진을 계속하고 있다.

28세에 하버드 대학 정교수로 취임

그는 학자 출신 관리치고는 말솜씨가 다소 어눌하지만, 경제 문제에 관한 한 특유의 논리적 화법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는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종종 상원이나 하원의 경제 관련 청문회에서 날고 긴다는 의원들이 그를 상대로 꼬치꼬치 질문을 퍼붓지만, 대부분은 그의 논리 정연한 답변에 설복당해 꼬리를 내리기 일쑤다.

82년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고 이듬해 이 대학 사상 처음으로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정교수에 취임해 관심을 끈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조세와 실업 문제 전문가인 그는 84∼90년 유명한 학술지 <계간 경제 저널>의 편집 책임자를 지냈으며, 이름난 경제 학술지에 논문을 백여 편 발표했다. <실업 이해>와 <동유럽 개혁> 두 저서는 해당 분야의 명저로 손꼽힌다. 이런 왕성한 활동 덕분에 그는 93년 2년에 한번씩 40세 이하의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상을 받았다. 또 전국과학재단이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기려 수여하는 앨런 워터맨 상을 수상했다. <타임>은 94년 12월5일자에서 21세기 미국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 5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꼽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삼촌인 폴 새뮤얼슨과 케네스 애로 두 사람 모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경제학자 집안의 끼를 타고 난 셈이다. 세법 변호사인 부인과 1남2녀를 둔 그는 루빈 장관이 월 스트리트로 돌아갈 경우 재무장관 1순위로 꼽힌다.

올해로 5년째 클린턴 경제팀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그는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가진 회견에서, 학자로 있다가 행정부에 발을 들여놓은 뒤 두 가지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나는, 학자로 있을 때는 어느 한 측면에서 경제 현상을 들여다보았는데 정부에 들어간 뒤 다양한 각도에서 경제 현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특정 계층의 이해가 아니라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정책을 짜고 집행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하나는, 때로 정책의 실수 때문에 공무원들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는 해도, 현재 미국 경제가 이 정도 굴러가는 것은 정말로 유능한 일꾼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덕분이라는 사실을 체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 번영은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르완다든 러시아든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으면 세계의 지도국인 미국이 주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나라들이 재기에 성공했을 때 민주주의는 더욱 확산될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미국 경제도 계속 번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 경제의 견인차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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