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제2 나토'' 뜨는가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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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프랑스 주도 '신속투입군' 구성 내역 공개 ··· 군사 정보 비공개 방침 '시끌'
유럽연합(EU)이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군대를 파견할 뜻을 처음으로 밝힌 때는 지난해 12월이다. 당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는 2003년까지 연합군을 구성한다고 합의했고, 규모는 5만∼6만 명으로 잡았다.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난 11월20일, 벨기에 브뤼셀에 모인 15개 유럽연합 회원국 국방장관들은 연합군 구성에 각국이 분담할 내역을 공개했다. 예를 들어 독일·프랑스를 포함해 6개국이 5천∼1만3천5백 병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15개 나라가 참여하는 군대가 6만 명 정도라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싱키에서 합의한 병력 규모는 육군에 한정된 것이고, 브뤼셀 회의에서 각국이 공개한 분담 내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육군 5만∼6만 명은 유럽연합군 작전 ‘한 번’에 필요한 병력이다. 아직 확정(또는 공개)되지 않은 공군·해군과 여기에 동시 다발로 벌어지는 작전까지 포함하면 전체 병력 규모는 크게 불어나게 된다.
유럽연합군 전체 병력 24만명 이를 듯

헬싱키에서 합의된 대로라면 ‘신속 투입군’이라 불리는 유럽연합군은 동원령이 떨어진 후 60일 이내에 소집되며, 그 후 약 1년간 작전 지역에 주둔해야 한다. 이런 작전 개념에 필수인 예비 병력까지 포함하면 전체 병력은 약 24만 명에 이른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브뤼셀 회의에서 공식으로 밝힌 바로는 병력 10만, 전폭기 4백기, 전함 100척이다. 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수치도 고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말 그대로 신속투입군의 면모를 드러내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한둘이 아니다. 그 중 하나는 해외 전쟁에 필수인 정보 통신망이 없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은 1990년대 초부터 공동 첩보위성망 구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개발 자금을 분담하는 문제로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유럽연합 내부의 갈등이다. 현재 유럽연합에 신설되는 군의 요직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유럽연합 내부의 연합군 구성을 경계하는 시각도 무시할 수 없다. 유럽연합의 소국들은 독일과 프랑스 등 군사 강국이 연합군 구성을 주도해 국가 주권이 위협받는 사태를 우려한다. 유럽연합은 군사 문제가 회원국 주권에 직결된다고 판단해 전체 회원국에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 결과 군사 관련 분야에 대한 결정은 회원국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에 반해 독일이나 프랑스는 군사 분야에서도 다수결 원칙을 바라고 있다. 유럽연합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다수결 원칙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주변국들은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유럽연합군의 기본 골격이 서유럽동맹(WEU)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동맹은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재무장을 감시하는 기구로 출범했다. 당시 서독 주변국들은 미국이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키자 서독의 재무장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서유럽동맹 회원국들은 서독의 재무장에 대해 또 하나의 안전판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회원국이 (서독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무조건 공동 대응한다는 의무 조항이다. 이것이 바로 서유럽동맹이 서방의 다른 안보 조약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지난해 유럽연합이 연합군 구성에 합의한 것을 두고 코소보 전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유럽연합은 코소보 전쟁 중에 미국으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당했고, 그 결과 독자적으로 해외에 투입할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연합군의 기본 과제는 1992년 서유럽동맹 회의에서 합의한 ‘페테르스부르크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 선언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서유럽동맹을 유럽연합의 기구로 격상하고 그 작전 지역을 유럽 밖으로 확대했다. 동시에 서유럽동맹은 미국이나 유엔의 동의가 없어도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벌인다는 전략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쪽에서 보면 서유럽동맹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유럽의 안보 기구이며, 앞서 말했듯이 회원국 간에 공동 대응 의무를 갖고 있다. 서유럽동맹은 이 점에서 유럽의 단결을 과시하는 군사기구로 삼기에 극히 이상적이다. 반면 독일이나 프랑스가 결정하는 군사 작전에 서유럽동맹 회원국들은 아무런 결정권 없이 말려들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난 7월28일에 있었던 유럽연합 결의이다. 이 날 유럽연합 회원국 정부 대표들은 서유럽동맹을 유럽연합의 공식 기구로 흡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결의를 앞둔 7월26일, 유럽연합 대표단에는 ‘이상 사태’가 일어났다. 서유럽동맹 총재이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담당관인 솔라나가 제안한 안건의 표결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다.
미국과 관련된 군사 문건은 대부분 비밀

문제의 안건은 유럽연합이 군사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방침대로라면 언론은 물론이고 유럽의회도 군사 문서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럽의회 율사들은 9월4일 긴급 회의를 열고 솔라나 안건이 의원들의 정보 접근 권리를 침해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독일의 나토 전문가 슈미트 엔봄은 솔라나가 이런 안건을 서둘러 표결에 부친 이유를 유럽연합 사무국과 나토가 7월에 맺은 안보 조약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군사 관련 문건 공개는 문건 작성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대개 미국이 관련된 군사 관련 문건은 비밀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국제언론인협회 유럽지부도 솔라나가 내놓은 안건을 ‘여론에 대한 선전포고’에 빗대고 이 전쟁의 막후에는 나토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보 접근권을 가로막는다는 발상은 유럽연합 조약에도 어긋난다. 군사 분야 문건 공개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28조에서 특별히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 255조는 유럽연합 시민이면 누구든지 유럽연합의 어떤 기구의 문서라도 열람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의 정보비밀주의가 고개를 드는 것은, 해외 군사 작전을 확대한다는 계획에 따라 충분히 예상되는 정보 공개 요구를 미연에 차단한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솔라나 안건에는 또 ‘비군사적인 분야의 위기 관리’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사회 질서 유지’나 ‘통화 안정’ ‘유럽 이주 난민’ 등 회원국의 내정 대책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비군사적 위기 관리’에 경찰 병력 약 5천명을 투입하겠다는 외부 개입 계획도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나 해외의 내부 문제도 안보 문제로 뒤바뀌어 통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정보비밀주의가 유럽연합 정책으로 확정되려면 솔라나가 말한 대로 유럽의회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정보 공개 원칙이, 서유럽동맹을 흡수해 군사화 노선에 들어선 유럽연합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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