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재벌 엘프의 추악한 '아프리카 경영'
  • 프랑크푸르트·허광 편집위원 ()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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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개발권' 따내려 정부와 손잡고 내전 개입·무기 밀거래

사진설명 덜미 잡힌 '황태자' : 미테랑 대통령 정권 아래에서 아프리카 특보를 맡았던 '대통령의 아들'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왼쪽). 그는 알공라에 불법으로 무기를 수출하는 것을 눈감아준 대가로 무기상 팔콘과 엘프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2월 구속되었다. ⓒAFP연합

독일이 통일된 후 끈질기게 떠돈 소문이 하나 있었다. 동서독 통합을 서두르던 서독의 콜 총리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동독 산업 중에서 알짜로 알려진 설비를 프랑스 기업 엘프에 헐값으로 넘길 때 수백억원대 커미션이 오갔다는 것이었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밀 거래설의 단서가 올해 초 드디어 잡혔다. 프랑스 검찰의 수사를 피해 잠적해 있던 엘프 중역이 체포되고, 콜 정부가 이 거래와 관련된 비밀 문서를 폐기 처분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엘프는 프랑스에서는 오래 전부터 '문제 기업'으로 찍힌 기업이다. 전 엘프 총수 알프레드는 3년째 잠적 중이고, 엘프가 출자한 은행 피바는 지난해 4월 검찰의 일제 수색을 받기도 했다. 엘프는 그 후 이 은행을 자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기업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엘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정계에 뇌물을 뿌린 사실이 잇달아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대 프랑스 정부가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개입해온 과거도 함께 드러났다.

엘프는 1965년 프랑스 정유 기업들의 합작 업체로 출범했다. 그 무렵 프랑스는 석유 자원 확보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중동은 영국과 미국이 선점해 이미 '남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식민지 알제리가 독립해 그곳의 자원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바로 북아프리카 연안의 가봉이다. 가봉의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설립된 엘프는 1960∼1970년대에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자원 확보 전략을 세웠다.

프랑스 정부가 엘프를 앞세워 '아프리카 영업'에 적극 나선 것은 미국과 경쟁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갓 독립한 나라마다 여지 없이 내전이 휩쓸고 있던 아프리카에서 정치 안정을 유지하려면 정치·군사 개입이 필요했다. 프랑스 정부의 아프리카 자문단이나 비밀 정보부가 처음부터 엘프와 공동 보조를 취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후 엘프는 가봉에서 가이아나·콩고·카메룬·앙골라로 자원 확보 지역을 확대했는데, 1980년대 미테랑 시대에는 아프리카 경영 전략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아프리카·프랑스 정계 '뇌물 거래' 뿌리 내려


사진설명 엘프 로고. ⓒAFP연합

그 하나는 아프리카 현지 집권 세력과 프랑스 정계 사이에 뇌물 거래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지난해 헌법위원회 롤랑 뒤마 위원장이 자신의 재산 중 일부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이 준 것이라고 시인하고 물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정부측 요원들이 점차 엘프의 고용원으로 바뀐 것도 새로운 추세이다. 정세분석가들은 이들이 스위스 은행을 거치는 돈세탁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수익을 최대한 축적해서 투자 지역을 차기 유망 지역인 리비아와 중앙아시아로 확대하기 위해서이다. 엘프 자체 자금을 운영하기 위해 은행도 세웠는데, 이 중 절반을 차지하는 개인 지분 중 35%를 가봉 대통령 봉고가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 현지 권력과의 유착을 실감케 하는 수치이다.

현재 유럽의회 의원 몇몇은 엘프의 위탁을 받아 앙골라 반군(UNITA)과 협상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앙골라 반군은 1997년에 전체 국토의 70%를 장악해 세력을 과시했다. 그때부터 반군은 유엔의 제재 조처를 받으면서도, 무기는 자유롭게 수입했다. 앙골라의 석유 자원 개발권은 현재 프랑스 엘프와 영·미계 업체가 각각 45%씩 나누어 갖고 있다. 서방이 자원 개발권과 관련해서 지지 세력을 바꾸면 앙골라 정세는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콩고 선거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구에소 현 대통령은 그 후 석유 개발권을 프랑스에 주었다. 반면 리소바 전임 대통령은 미국 기업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소바는 선거 전까지만 해도 엘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프랑스 정보부와도 접촉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막상 선거에서 패하자 구에소 현 대통령측이 앙골라 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며 무기 수송은 엘프가 맡았다고 밝혔다. 파리에 망명하고 있는 그가 엘프를 고소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가 제시한 소송 자료에는 엘프와 거래한 무기 협상 내역도 들어 있어, 검찰이 엘프를 수사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정권 교체후 '앙골라 게이트' 비리 드러나


엘프의 실체가 전면에 떠오르게 되기까지는 이렇게 많은 곡절이 있었다. 일부 분석가들은 여기에 정권 교체를 덧붙인다. 미테랑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엘프를 비롯한 흑막의 주인공들을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미테랑의 아들이 뇌물 사건으로 체포된 것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좋은 사례이다. 이 사건은 '앙골라 게이트'라 불린다. 프랑스에서는 재벌로 통하는 무기상 팔콘과 앙골라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무기상 팔콘이 앙골라에 불법으로 무기를 수출한 혐의를 잡고 그의 세무 비리를 캐는 과정에서 정계 요인들이 관련된 물증을 잡았다. 팔콘이 미테랑 정부에서 아프리카 특보역을 맡았던 미테랑 아들과 내무장관, 전임 정보부 거물들에게 뇌물을 뿌린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팔콘은 미국 선거전에서 부시를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며, 앙골라 석유 자원 개발권 중에서 엘프와 영·미계 업체의 지분을 뺀 나머지 10% 지분을 갖고 있기도 하다.

지난 1월,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모인 국제 회의에서 주요 쟁점은 콩고 내전이었다. 이 자리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주변국들이 콩고에서 점령국 행세를 하며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약탈하기는 프랑스도 다를 바 없으며, 앞으로 달라진다는 보장도 없다. 시라크가 1월 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약속한 것은 15개 극빈국의 채무를 면제한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지난해 오키나와 G7 정상회의에서 '어차피 받지 못할 것 선심이나 쓰자'며 합의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아프리카 스캔들 수사에 나선 것은 '미테랑 이후의 아프리카 라인'을 새로 꾸리려는 작업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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